유신시대 옥중서 "긴급조치 해제하라"…법원, 46년 만 무죄 선고

진현우 기자 (hwjin@dailian.co.kr)

입력 2025.06.04 16:00  수정 2025.06.04 16:07

학내 민주화 시위·옥중 구호 외쳐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실형

재판부, '노벨문학상' 한강 문구 인용해 사과…"미래 위한 밑거름 되길"

대전지방법원 ⓒ뉴시스

유신 체제 당시 옥중에서 긴급조치를 해제하라고 구호를 외쳐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은 당시 20대 청년에게 법원이 50년 가까이 지나 무죄를 선고했다.


대전지방법원 형사12부(김병만 부장판사)는 4일 오후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용진(69)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김용진씨는 서강대학교 국어국문과 2학년 재학 중이던 지난 1977년 학내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긴급조치 제9호는 지난 1975년 5월13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 의해 발령된 조치로 유신 헌법의 개정이나 폐기를 주장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김용진씨는 수감 중이던 1978년 6월과 당해 10월 '긴급조치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쳐 또다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이듬해 4월 징역 1년6개월을 추가로 선고 받았다.


김용진씨는 40여년이 지난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환기해야겠다는 생각에 해당 판결에 대한 재심을 신청했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3년 재판관 만장일치 의견으로 긴급조치 9호를 위헌으로 결정했고 대법원도 같은 해 위헌으로 판단한 바 있다.


이날 재판부는 "국가긴급권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중대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원인에 대응하기 위해 발동하며 유신헌법도 이 조건에서 예외일 수 없다"며 "유신 체제 당시 체제를 비방하거나 폐지를 주장하는 등 선전 행위를 금지하고 국가로 하여금 국민의 기본적 인권의 최소한 보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신체 뿐만 아니라 표현 등 여러 자유를 제한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결정해 무죄로 선고해야 한다"며 "공소사실은 긴급조치 제9호가 당초 위헌 무효로 판단돼 범죄라고 볼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하기로 한다"고 판시했다.


무죄 선고 후 김병만 부장판사는 "유죄를 선고한 것도 대한민국 법원이고 무죄를 선고한 것도 대한민국 법원"이라며 "피고인(김용진씨)이 겪었던 고초에 대해 대한민국 법원 구성원으로서 늦었지만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이 선고가 단순히 피고인이 과거에 겪은 고초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김병만 부장판사는 작가 한강씨의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발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던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재판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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