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븐베일즈’
트라우마(trauma)란 그리스어로 몸의 ‘상처’를 뜻한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에서는 강렬한 충격 사건이 개인의 정신과 정서에 남긴 상처와 후유증을 의미한다.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는 모든 예술에서도 트라우마를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인물 내면에 뿌리 깊게 남은 상처가 드라마틱한 갈등 구조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세븐베일즈’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현재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스릴러 장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제닌(아만다 사이프리드 분)은 스승 찰스의 유언에 따라 그의 대표작이었던 오페라 ‘살로메’의 연출자로 취임한다. 위대한 스승이었지만 구시대적인 요소가 많았던 찰스의 작품이었기에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때문에 배우와 제작진 사이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자주 발생한다. 더 큰 문제는 준비 과정에서 계속해서 과거에 받은 트라우마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총체적 혼란 속에서 제닌은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끝낼 수 있을까.
영화는 트라우마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세븐베일즈’에서 트라우마는 단순한 영화의 소재나 배경이 아닌 이야기의 핵심 동력으로 사용된다. 제닌은 이중적 상실을 안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지만 외면했던 어머니에게 큰 정신적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실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스승이자 연출자 찰스의 죽음은 그녀에게 또 한번의 상처를 주었다. 과거의 트라우마는 현재의 불안정한 심리로 이어지면서 그녀의 삶과 일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은 배우들이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되살아나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게 만든다. 트라우마는 단순히 나쁜 기억이라고 하기보다는 개인의 신체, 정서, 행동 전반에 장기적 미치는 정신적 상처임을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킨 감동적 서사를 보여준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감독 아톰 에고이안은 실제로 오페라 ‘살로메’를 연출하며 받은 영감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의붓딸 살로메의 매력에 빠진 헤롯에게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는 내용이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선율이 결합된 작품으로 영화의 메타 텍스트로 사용됐다. 제닌은 무대를 연출하면서 요한의 침묵과 학대를 재연할 때마다 살로메가 요한의 목을 얻기 위해 일곱 개의 베일을 하나씩 벗듯, 제닌을 둘러싼 숨겨진 진실과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녀의 어린 시절 억압된 목소리와 맞닿으며 작품 안팎에서 트라우마가 증폭된다. 그러나 제닌은 작품의 연출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로부터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감독은 인간 심연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제닌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작품을 완성해 나아가는 회복의 과정 또한 조명해 트라우마를 다층적으로 접근한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그녀의 노력은 어떤 작품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배우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연기 또한 작품의 중심을 잡고 있다. 영화는 메타텍스트를 이용해 트라우마의 다층성을 조명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고 산만하게 진행된다. 오페라 ‘살로메’의 이야기를 넣어 영화 속 영화라는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비선형적 플롯과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인서트 장면도 많다. 이렇게 주인공 제닌의 복잡다단한 심리상태와 인물들간의 복잡한 관계가 한데 뒤섞이며 혼란을 가중 시키지만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발군의 연기 실력이 관객들을 집중시킨다. 작고 마른 몸은 연출자로서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픈 상처를 가진 여성으로 표현된다. 큰 눈을 이용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작품에 매진하는 예술가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으며 트라우마를 여성의 서사로 풀어냈다.
현대 사회는 복잡해지면서 육체의 상처보다 마음의 심리적인 트라우마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는 인간관계는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 심리적 고립, 세대 간, 젠더 간의 적대감 등 많은 트라우마에 노출돼 있다. 이러한 심리적 트라우마는 앞으로 더욱 고조될 것이 우려된다. 영화 ‘세븐베일즈는’ 트라우마의 심각성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성찰을 남기는 작품이다.
양경미 / 전)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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