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을 위한 영화제의 고군분투
지역 영화제를 둘러싼 풍경은 지금 녹록지 않다. 독립성과 실험성, 공동체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뿌리내린 지역 영화제들이 줄줄이 예산 삭감의 위기를 맞이했다.
춘천영화제는 약 3000만 원의 지원이 삭감되었고, 정동진독립영화제는 강릉시로부터 7000만 원이 예산이 깎여 주요 프로그램과 편의시설 운영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들 영화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닌, 지역 공동체 속에서 청년 기획자들이 성장하고,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로컬 문화의 다양성과 실험을 실현해 온 플랫폼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존속 여부는 관객 수나 문화적 성과보다는 행정기관의 예산 편성과 정책 기조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 정동진영화제, "영화제 지원사업 근시안적이고 모호한 기준 아쉬워"
정동진독립영화제는 1999년, 영화를 사랑하는 강릉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시작됐다.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에 돗자리를 펴고 영화를 보는 특유의 관람 방식은 정동진이라는 지역성과 맞물려 독특한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왔다. 지난해에는 1만 4500명이 다녀가며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운 관객 증가를 기록했고, 응답자의 74%는 영화제를 목적으로 강릉을 찾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강릉시는 올해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지원 예산을 지난해 1억 2000만원에서 7000만원이 삭감됐다. 지난해 예산 절반이 넘는 액수다.
김슬기 강릉씨네마떼끄 사무국장은 "사실 올해 정동진독립영화제와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강릉시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올해 개최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었다. 지난해 역대 최고 관객 수와 좋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예산이 줄어든 이유는 끝내 설명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사업에 선정되었지만, 예산의 삭감 기조 속에서 안심할 수 없다고 전했다.
김 사무국장은 "작년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제 지원사업이 축소, 개편되고, 지원사업에 선정되지 못하면서 운영상의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작년에는 강원도의 어떤 영화제도 지원받지 못했다. 올해는 예산이 확대되고 정동진독립영화제도 영화제 지원사업에 선정된 상황이나, 예산 확대에 대해서는 서울독립영화제의 삭감된 예산이 편성되었다는 점과, 영화제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지원사업이 근시안적이고 모호한 기준을 갖고 있어 아쉽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기조로 다양한 영화제들이 사라지고, 창작·관람환경이 저해되며, 정동진독립영화제 또한 이러한 영향에서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빠듯한 살림 속에서 문턱이 없는 영화제를 지키기 위해 유료를 고민했지만 관객들에게 부담 주지 않는 선에서 운영하려 계획 중이다.
김 사무국장은 "올해는 강릉의 문화공간들과의 협업을 통해 사전순회상영회를 하는 등 지역과 영화제를 함께 만들어가는 시도를 진행해 보려고 한다. 친환경적이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영화제를 모토로, 기존에 진행하던 전 작품 배리어프리 버전 상영, 수어, 자막 통역 제공 외에도 다른 시도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제12회 정동진영화제 방향성을 밝혔다.
그러면서 "다른 축제도 그렇겠지만, 영화제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원금 집행 기준에서 인건비 사용의 제한을 줄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모 형태의 지원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영화문화 발전에 기여한 영화제들이 안정적으로 매년 개최할 수 있게 기본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 춘천영화제 "누군가의 첫 영화를 위해, 올해도 자리 지킨다"
춘천영화제는 2014년,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를 세계에 알리고 인정받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 고 이성규 감독을 기리며 시작됐다. 한때 장르 중심의 영화제로 운영되기도 했지만, 10회를 기점으로 초심으로 돌아가 한국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이성규 감독의 정신과 춘천이 지니는 문화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영화제를 이어가고 있다.
작년 조직 개편 이후, 박기복 이사장(강원대 교수)과 이대범 조직위원장(전 강원대 교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춘천영화제는, 보다 자율적이고 유연한 기획·운영 체계를 갖췄다. 올해는 영화제 경력을 두루 쌓아온 함유선 프로그래머, 이선경 코디네이터, 무대감독 출신의 이혜림 사무국장, 디자이너 출신의 박선정 홍보마케팅 팀장 등 네 명의 청년 기획자가 주축이 되어 축제를 준비 중이다.
춘천영화제는 그동안 지역 문화의 다양성과 독립영화 생태계를 확장해온 실험의 장으로 자리를 지켜왔지만, 최근 강릉시에 이어 춘천시 또한 지원 예산을 약 3000만원 삭감하며 운영에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춘천영화제 박선정 홍보마케팅 팀장은 "프로그램, 이벤트, 홍보마케팅 등 전 영역에서 예산을 긴축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전부터 개최일을 단축하거나, 외주 용역 대신 디자인과 제작을 내부 인력으로 감당하는 등의 방식으로 비용을 절감해 왔다. 텀블벅 펀딩, 지역 후원과의 협력을 통해 운영을 이어오고는 있지만, 올해는 영화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상영 편수 축소까지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할 정도로 여건이 어렵다"라고 토로했다.
이는 단순한 축제 규모의 축소를 넘어 창작자들이 설 무대를 잃고, 관객이 누릴 수 있는 문화적 선택권 역시 함께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근심이 짙다.
박 팀장은 2023년 8011명에서 2024년 1만 4500명으로 관객수가 증가했음에도 예산이 삭감된 정동진독립영화제,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예산 삭감 사례를 예시로 들며, 지역에서 오랜 시간 의미를 쌓아왔더라도 행정적 판단 하나로 삭감은 물론 존폐까지 결정될 수 있다는 현실은 현장에서 영화인들이 가장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 중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영화제는결국예산을결정하는지자체의판단에크게좌우된다.업계에서는'새로운영화제가살아남는지는5년은해봐야안다'는말이있을만큼,영화제는단기적인성과보다는긴호흡의지원과기다림이필요하다.춘천영화제도어느덧12회를맞았지만,여전히해마다예산편성을앞두고마음을졸여야하는상황"이라고전했다.
예산 삭감 위기 속에서도 춘천영화제를 이끄는 구성원들은 여전히 영화제를 지켜내겠다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현재의 스태프들은 2022년 폐지된 평창국제평화영화제를 함께했던 동료들로, '삭감'을 넘어 '폐지'를 직접 겪은 경험이 있기에 위기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박 팀장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포기보다는 지켜내자는 마음으로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양한 기관과 기업에 후원을 제안하고 실질적인 협력 체계를 만들고 있으며, 강원 영화계 내부에서도 서로를 응원하는 연대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춘천영화제는 위기 속에서도 지속 가능성을 위한 대안적 모델을 고민 중이다. 강원도 내에는 춘천(6월), 정동진·원주(8월), 강원영화제(12월)로 이어지는 독립·예술영화 상영의 순환 고리가 형성되어 있으며, 강원독립영화협회, 강원문화재단, 강원영상위원회의 창작자 지원 프로그램이 함께 지역 영화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다.
영화제 내부적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산림복지진흥원 제안으로 춘천국립숲체원에서 2024 산림문화 영화제를 시범 운영했으며, 이후에도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협력 제안을 받고 있다. 영화제 기간 외에도 연중 상시 운영 사업을 확장해, 안정적인 구조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정책 전반이 창작자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현장의 비판은 여전하다. 박 팀장은 "정책이 판단하는 기준에 의해 예산 삭감과 폐지 등으로 다양성과 실험성이 점점 잃어가고 있다. 영화제는 결과보다 과정에 가까운 플랫폼이다. 지금의 정책이 축적된 시도를 지켜낼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춘천처럼독립예술상영관조차없는지역에서영화제를지속한다는것은,결국창작자들의설자리를지키는일이기도하다.
박 팀장은 "10회 영화제 폐막 즈음, 한 고등학생이 티켓 부스에 손편지를 남기고 갔다. 영화과 진학을 꿈꾸며 막막했던 마음을 영화제를 통해 위로받았고, '나만 영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며 "그 마음이야말로 영화제가 지키고자 하는 출발점이자 정신이다. 춘천영화제는 지역에서 영화를 만들고 사랑할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자리다. 누군가의 첫 영화를 응원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지속의 용기를 건네는 축제가 되기 위해 올해도 묵묵히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라고 의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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