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태현, 익숙함과 식상함 사이

이준목 객원기자

입력 2008.12.10 21:43  수정

한때 ‘박중훈표 코미디’라는 표현이 영화계에서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석규가 90년대 중후반을 평정하고, 최민식·송강호·설경구가 2000년대의 트로이카로 군림하기 이전, 한국영화의 흥행 보증수표는 단연 박중훈이었다.

박중훈은 <투캅스>를 필두로, <돈을 갖고 튀어라> <할렐루야> <깡패수업> <마누라 죽이기>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며 흥행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다.

물론 중간에 <게임의 법칙> 같은 느와르 영화도 있었지만, 많은 관객들은 대부분 박중훈의 코믹 이미지만을 기억했다. 박중훈의 최대 실책은 차별화되지 못한 상업영화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반복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소모했다는 점이다.

이후 박중훈표 코미디는 점차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외면 받으며 충무로의 주류에서 밀려났고, 배우 본인은 <인정사정볼것없다>와 <황산벌> 등을 통해 재기하기까지 한동안 슬럼프를 겪어야했다.


■ <엽기적인 그녀> 이미지 변주, 그 결과는?

차태현.
2000년대 들어 한국영화의 주연급 남자배우 중 코미디 장르에서 특화된 이미지를 구축해온 배우로는 임창정과 차승원, 김수로, 그리고 차태현 등을 들 수 있다. 이중에서 차태현은 데뷔 초창기와 비교하여 가장 이미지의 변화가 없는 배우로 꼽힌다.

임창정, 차승원과 김수로가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가끔 파격적인 연기변신을 하거나, 다른 캐릭터와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천천히 확장해온 것과 달리, 차태현은 아주 최근까지 2001년작 <엽기적인 그녀>의 이미지를 변주하며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배우 본인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끔씩 자학개그의 소재로 삼을 만큼,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엽기적인 그녀>이후 꾸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영화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연애소설> <파랑주의보> 등 그의 주요 출연작 캐릭터들은 <엽기적인 그녀>이후 구축된 차태현 특유의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 혹은 ‘어리숙한 순정남’, 이 두 가지 이미지에서 모두 파생된 스핀 오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대중이 가장 사랑해온 차태현의 이미지인 것도 사실이지만, 음식으로 치면 자장면 아니면 짬뽕, 수년간 오직 이 두 가지 메뉴로 손님들을 상대해왔다고 할 수 있다.

차태현은 최근 출연작인 드라마 <종합병원2>과 영화 <과속스캔들>에서도 어쩌면 기존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판에 박힌 ‘캐릭터 연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과속스캔들>은 어차피 처음부터 큰 욕심이 없는 코미디였다. 그러나 <종합병원>에서 파트너인 김정은과 함께 보여 지는 차태현의 연기는, 10년 전 <해바라기>시절에 비하여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배우로서의 흡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본인도 이를 의식한 듯,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끔 연기변신에 관한 지적이 나올 때마다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차태현이 기존과 다른 연기변신을 시도한 작품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좋은 반응을 거두지는 못했다. 짐 캐리나 주성치, 성룡 등과 같이 배우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연기를 파고들어서 특화시킨다는 전략 자체는 그리 나쁠 게 없다.


■ 비슷한 연기 반복 ‘전작 이미지에 갇혀’

하지만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연기의 패턴에 있다. 주성치나 송강호 같은 명배우들의 경우, 수많은 출연작에서 코미디이건 정극연기를 하건 같은 장르를 연기해도 비슷한 캐릭터를 반복한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우아한 세계>와 <반칙왕>, <넘버3>에서 송강호의 연기는 같은 코미디라 할지라도 그 톤이 다르다. <에이스 벤츄라>와 <마스크>까지만 해도 단지 개그맨에 불과했던 짐 캐리는, <트루먼쇼>와 <맨 온 더 문>에서는 자신의 장점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희극적인 정극 연기’로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최수종은 <태조 왕건>에 이어 <대조영>을 연기하면서 똑같은 인물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2년간 채식 다이어트를 고수하는 등 연기외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연기의 장르를 떠나 아예 똑같은 캐릭터를 재탕한다고 할지라도, 배우의 노력과 연구에 따라 얼마든지 그 톤을 차별화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인정받는 고급 배우인 것이다. 한 가지 이미지를 끊임없이 복제하며 현상유지로 커리어를 이어가는 배우들의 연기와 동일수준에서 취급한다면, 그것은 곧 연기에 대한 모독이다.

차태현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준 자신의 연기와 차별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이 얼마나 있었는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차태현의 연기변신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작품의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기존의 전작들에서 보여준 이미지에서 한발자국과 진화하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다. 연기변신을 하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못한 게 문제다.

연기변신이란 것이 진지한 이미지의 배우가 어느 날 갑자기 망가지고, 코믹한 이미지 배우가 갑자기 진지한 연기를 하겠다고 달려드는 것 같이 거창한 차원이 아니다.

박중훈의 사례가 좋은 예다. 틀에 박힌 박중훈표 코미디의 수명은 5년을 넘기지 못했고, 임창정이나 차승원은 10년 넘게 줄곧 코미디 영화 위주로 꾸준히 출연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캐릭터를 변주하며 자신만의 코믹 연기 영역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30년, 40년을 한 가지 이미지로 먹고사는 조연배우들도 있지만, 차태현은 하나의 극을 이끌어 가야하는 주연배우다. 어떤 작품에 출연해도 그 작품을 마치 재방송을 보는 것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버리는 힘은 주연배우가 지녀야할 덕목은 아니다.[데일리안 = 이준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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