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나태'의 선관위, 언제까지 '언터처블'로 둬야 하나 [박영국의 디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입력 2026.06.05 11:17  수정 2026.06.05 12:32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국민 참정권 침해, 정치 혼란 초래

견제도, 감시도 받지 않는 선관위…오만·나태·무능·부패 만연

노태악 위원장, 5일 대국민 사과…해체 수준의 개혁 화두 던지길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이번 6·3 지방선거는 여러모로 시끌벅적했습니다. 득표수에 따라 개별 후보는 물론, 여야 정당까지 희비가 엇갈렸지만, 무엇보다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은 ‘선수’가 아닌 ‘심판’ 역할을 해야 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였습니다.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수천 명의 유권자들이 참정권을 침해당하도록 만든 사상 초유의 사고를 친 거죠. 국내 뿐 아니라 해외토픽에 올라 전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투표용지를 제작할 돈이 부족해서였을까요? 선관위는 각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전체 유권자 수의 1.1배에 달하는 투표용지를 제작하겠다며 예산을 받아 갔다고 합니다. 예산은 110%를 받아내 놓고 50%만 제작하는 기상천외한 일을 저지른 겁니다.


일을 하는 자들과 관리자, 책임자들이 얼마나 나태하고 무능하면 저런 정도의 사고를 칠 수 있을까. 예상 가능한 범주 밖에 있는, 전무후무한 일이기에 수습도 쉽지 않습니다.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는 시민들이 투표함 반출을 막아선 채 시위를 벌이다 사흘 째인 5일 오전에야 경찰 병력에 의해 해산됐습니다. 이곳의 투표함은 투표 마감 35시간 만에 개표소로 이송됐습니다. 이 일로 당선자들은 ‘당선자’라는 법적 지위를 확정받는데 이틀을 더 기다리게 됐습니다.


가뜩이나 부정선거론을 앞세워 온갖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이번 사태는 아주 좋은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침 선관위 뒷산에서 불이 난 것을 두고 ‘부정선거 증거 인멸’이라느니, ‘특정 후보의 도장이 찍힌 투표용지를 빼돌려 태우다 불을 냈다’느니 확인되지 않는 소리들을 해 대는 이들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선거무효 또는 당선무효 소송 등으로 혼란은 계속될 겁니다. 어떤 정당은 선거를 망쳐놓은 무능한 당대표를 내쫓아야 하는데, 저 사건을 빌미로 버티기에 들어가 내홍이 불가피하게 됐습니다.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이 나서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누가 책임지겠다는 얘긴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를 운영하겠다고는 하는데,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터라 설령 외부 인사 몇을 끼워 넣는다 해도 진상조사가 제대로 될지, 본인들 자리보전을 위한 완벽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할지 모를 일입니다.


6·3 지방선거 본투표일인 지난 3일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투표시간이 오후 10시까지 연장된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 앞에 국민들이 모여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들이 그토록 오만할 수 있는 배경에는 ‘독립된 최고헌법기관’이라는 타이틀이 있습니다. 직원 자녀를 뒷구멍으로 채용하는 비리를 저지르고도 감사를 못 받겠다고 버티다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까지 청구해 자신들은 ‘언터처블’임을 공인받은 집단입니다.


외부의 견제가 없으면 오만해지기 마련이고, 오만은 나태와 무능과 부패를 불러옵니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도 견제받지 않고 감시받지 않는 나태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선관위는 늘 그랬듯이 이번 사태를 대충 뭉개고 실무자 몇 명에 가벼운 징계를 내리는 선에서 매듭지을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봐야 누가 우릴 건들겠어”라고 국민들을 비웃으며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다릅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선거판을 뒤흔들어놨는데 버텨서 될 일이 아닙니다.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에 대해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거취를 고민하라는 요구가 나왔습니다. 국민들도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가 일제히 허 사무총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처럼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단 한 사람에게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사례는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간 끌다가 더 추한 꼴 당합니다.


노태악 선관위원장이 5일 오후 브리핑을 열고 대국민 사과를 한다고 합니다. 선관위원장 자리가 비상근이라고 하지만, 그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선관위 사무국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들여다볼 의지가 없다면, 최고헌법기관 중 한 곳의 수장이라는 명예와 국민 혈세로 제공되는 처우를 누리는 자리가 존재할 이유도 없습니다.


비상근직이라 선거사무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면, 최소한 선관위 조직의 나태와, 무능과, 부패라도 손을 봤어야 하는 게 그 정도 자리에 있는 높으신 분이 지녀야 할 책임감입니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라는,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 수준의 사고방식으로 넘길 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선거판을 뒤흔든 최악의 사고가 바로 ‘노태악 선관위’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사화될 것이고, 인구에 회자될 것이고,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부디 브리핑 자리에서 진솔한 사과와 국민이 납득할 만한 해명이 있길 바랍니다. 나아가, 나태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선관위 조직이 지금의 권한과 지위를 유지한 채로 존치되는 게 맞는지, 기왕이면 선관위원장을 통해 자발적으로 ‘해체 수준의 개혁’이 선언되는 그림도 기대해봅니다.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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