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끌어온 사법 리스크, 마침표
연쇄적 M&A로 시동... 올해만 세 건
제약 벗은 삼성, 공격적 경영 행보 기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7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관련 혐의로 2020년 기소된 지 4년 만이다. 지난해 2월 1심에 이어 지난 2월 2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된 바 있다.
앞서 지난 2017년 2월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 기소돼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것까지 모두 포함하면 10년 가까이 이어졌던 사법 리스크가 사실상 완전히 정리됐다.
그간 사법 리스크는 그룹 차원의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 미래 사업에 대한 전략 구사에 보이지 않는 제약으로 작용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부터는, ‘제약이 사라진 삼성’이 어디로 향할지가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재계의 가장 큰 분석이다.
다시 움직이는 M&A…올해만 세 건
17일 재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삼성은 뚜렷한 흐름을 갖고 세 건의 인수를 단행했다. 지난 4월 자회사 하만을 통해 미국 마시모의 오디오 사업부를 약 5000억 원에 인수했고, 5월에는 독일 상업용 공조기업 플렉트를 2조4000억 원에 사들였다.
이달 초에는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젤스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들 M&A는 개별로 보면 각기 다른 산업군에 속한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전체 흐름을 놓고 보면 ‘AI 이후의 삼성’을 준비하는 선형적 포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마시모의 오디오 사업부 인수는 삼성전자가 2017년 하만을 인수하며 본격화한 ‘모빌리티+공간 중심 음향 플랫폼’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단순히 고급 음향 브랜드를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AI 기반 인포테인먼트, 차량용 음성 인터페이스, 스마트오피스·스마트홈 환경에서의 사용자 경험 전반을 고도화하는 데 필요한 핵심 감각 기술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다.
하드웨어적 정밀도를 확보한 상태에서 음향과 청각은 디지털 전환 이후 ‘인식과 반응의 수단’이 되고 있다. 마시모는 의료기업이지만, 이번에 삼성이 사들인 사업부는 독립적 오디오 브랜드를 다수 보유한 부문으로, 하만과의 시너지 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5월 인수한 독일 플렉트의 경우 구조적으로 또다른 종류의 딜이다. 플렉트는 상업용 빌딩 공조 시스템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으로, 단순한 하드웨어라기보다 AI 기반 에너지 관리 시장 확대에 대응하는 전략적 인프라 확보라는 맥락으로 읽힌다.
전통적인 HVAC(냉난방·공조) 산업은 한때 저성장 분야로 분류됐지만, 최근 스마트빌딩·스마트팩토리 수요 확대, ESG 기준의 강화, 탄소감축 기술 확보 등의 트렌드가 겹치면서 재조명되고 있다. 삼성은 이미 시스템 에어컨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었지만, 플렉트 인수를 통해 유럽 시장을 거점화하는 동시에 자사의 스마트홈·스마트빌딩 플랫폼을 실물 공간에 적용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확보한 셈이다.
뒤이어 이달 초 전격적으로 발표된 미국 젤스 인수는 삼성의 헬스케어 전략의 지평을 실질적으로 확장하는 행보다. 지금까지 삼성전자가 강조해온 '삼성헬스'는 스마트워치 기반의 소비자 건강관리 서비스에 가까웠지만, 젤스는 의료기관, 보험사, 기업 고객 등을 상대로 건강정보를 수집·분석·서비스화하는 B2B 중심의 디지털 헬스 플랫폼을 지향한다.
삼성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통해 확보한 개인 건강 데이터를 젤스를 통해 의료 AI 알고리즘, 맞춤형 질병 예측, 원격 의료 인프라 등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헬스케어를 ‘기기의 부가기능’이 아니라 ‘미래 사업의 한 축’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발로 뛰는 경영, 다음 인수는 어디?
삼성의 인수합병 전략은 이재용 회장의 최근 글로벌 행보와도 궤를 같이한다. 단순히 지시를 내리는 수준을 넘어, 이 회장이 직접 현장을 누비며 사업 확장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이 회장은 지난 1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면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반도체 소재·장비 협력 강화를 논의했다.
7월 초에는 미국 아이다호에서 열린 ‘선밸리 콘퍼런스’에 참석해 글로벌 테크·헬스케어 기업 CEO들과 교류하며 AI 인재, 바이오텍, 디지털 헬스 분야의 투자처를 직접 타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통상 본인이 직접 나서는 M&A 건은 공개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일정이 “본격적인 준비 신호”라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이 회장의 무죄 확정은 이러한 흐름에 상징성과 동력을 동시에 부여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7년 하만 인수 이후 사실상 멈춰섰던 대형 M&A는 그간 국내외 규제와 정치 리스크, 이 회장의 법적 불확실성이 삼중으로 작용하며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딜은 작되, 방향은 크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인수들이 이어지면서, 시장에선 이 회장의 경영 행보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삼성은 지난 2023년에는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인 룬을, 지난해에는 의료기기 업체 소니오를 인수한 바 있다. 삼성의 다음 인수 대상으로는 AI 반도체 패키징 기술을 보유한 미국 및 일본의 팹리스 스타트업, 유럽계 스마트 에너지 관리 솔루션 업체, 북미의 클라우드 기반 의료 데이터 플랫폼 기업 등이 거론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은 자체적으로도 시스템반도체·AI·바이오 등을 2030년까지 핵심 성장축으로 설정해왔지만, 최근 시장 판도는 기술력 못지않게 시장 진입 속도가 중요해지고 있지 않느냐. 필요한 기술과 레퍼런스를 확보한 외부 기업 인수에 적극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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