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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탐구④] 이런 여자 어느 영화에도 없습니다, 정가영


입력 2020.07.07 15:00 수정 2020.08.09 19:30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정가영 배우이자 감독,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여성캐릭터 창조

욕망에 당당하고 관계에 솔직한 캐릭터들이 주는 ‘해방감’ 일미

배우이자 감독 정가영 ⓒ 영화 '밤치기' 스틸컷 배우이자 감독 정가영 ⓒ 영화 '밤치기' 스틸컷

기사는 영화를 닮는다. 박찬욱 영화 관련 기사를 쓰다 보면 조사 하나의 선택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나를 발견한다. 관객을 위해 완벽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한 한 명의 관객으로서 감사이기도 하지만, 설명할 수 없이 그렇게 작동되는 ‘기사 작성의 원리’가 있다. 오늘 이 기사를 이렇게 쓰고 있는 것도 어쩌면 정가영이라는 배우가 정가영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 안에서 보여 주는 특성들, 감독으로서 보여 주는 정가영표 작품의 선명한 특징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가영이라는 배우이자 감독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이 구상하고 스크린 위에 구현해 내고 당신의 몸과 목소리로 창조해 낸 ‘정가영’이라는 캐릭터를 즐기고 있는지 말하고 싶었다. 이 즐거움을 좀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미약한 기사라도 쓰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정가영과 배우 김최용준 ⓒ 영화 '비치온더비치' 스틸컷 정가영과 배우 김최용준 ⓒ 영화 '비치온더비치' 스틸컷

이유는 이렇다. 배우 정가영이 출연하든 출연하지 않든 그의 영화 속 여자들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의견 표현에 당당하다. 특히나 정가영이 출연해 정가영을 연기할 때는 그 솔직 당당함에 쾌감이 느껴진다. 정가영이 그려내는 여자들, 세상엔 흔할 수도 많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영화 안에선, 특히나 한국영화에선 ‘미증유 사건’ 급으로 보기 드문 여자들. 본 적 없던 만큼 더 커지는 쾌감. 그런데 그 쾌감이 나처럼 솔직 당당하지 못했던 세대만이 느끼는 것인지, 여자들만의 것인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기자라는 직업이 그냥 한 줄 쓰는 것 같지만, 전 세대에게 공통일 수 있는 생각과 감정을 추구한다. 자칫 기사가 아니라 일기장이 되면, 기자가 먹는 욕은 고사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는 정가영 배우와 감독에게 해가 될까 걱정이 됐다.


또 있다. 정가영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궁금증이 생긴다. 이거 감독이 겪은 실화인가, 영화 속 정가영의 캐릭터가 감독의 캐릭터 그대로인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렇다. 연기가, 무엇보다 연출이. 재미있는 다큐멘터리인지 극영화인지 헷갈리는 특별한 지점들, 정가영이라는 인물의 영상다이어리를 훔쳐보는 느낌. 이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영화가 주는 커다란 영화적 재미이기도 하지만, 실화인지 실제 인성인지 궁금해하는 ‘유치한 나’를 지울 수 없어 기사를 쓰지 못했다. 정가영이라는 감독과 배우는 나를 기자가 아니라 철저히 관객이요 팬으로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발칙해도 괜찮아 ⓒ 영화 '비치온더비치' 스틸컷 발칙해도 괜찮아 ⓒ 영화 '비치온더비치' 스틸컷

그런데 이 일기장 같은 글을 왜 쓰고 있느냐고. 두 가지 이유다. 정가영의 영화가 내 안에 쌓이며 ‘여자라서 느낀 거면, 요즘 사람 아니라 느낀 거면, 아니 나만의 생각이면 왜 안 돼?’라는 뻔뻔함이 생겼다. 현재의 연애를 상담하겠다고 헤어진 남자친구를 찾아가고, 현재의 불륜을 상담하겠다고 과거 불륜남을 찾아가는 뻔뻔함. 그리고 그 남자들과의 대화와 대화보다 진한 대화가 되는 성행위를 통해 자신이 위로를 받는 건 기본, 과거 제대로 찍지 못했던 ‘마침표’를 그리며 상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정가영 캐릭터가 내게도 옮아진 결과다.


두 번째는, 올해 개봉한 정가영 감독의 ‘비치 3부작’ 결산 영화 ‘하트’를 이제야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품었던 다소 부끄러운 궁금증들을 극중 배우 재섭이 대신 묻고, 정가영 감독은 언제나 그러했듯 솔직하게 답해 주었기 때문이다. 답은 포털사이트에서 구매하거나 이미 지불한 왓챠플레이에서 관람할 수 있는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했으면 한다. 그것도 기왕이면 정가영 감독 또는 정가영 감독·주연의 단편들과 장편들을 몇 편이나마 본 후 ‘하트’를 보면 재섭의 질문이 너무나 반갑고, 나만 유치한 건 아니었구나 싶어 미소가 번질 것이다.


정가영이 보여 주는 진짜 여자 ⓒ 영화 '밤치기' 스틸컷 정가영이 보여 주는 진짜 여자 ⓒ 영화 '밤치기' 스틸컷

자, 그렇다면 얘기의 시작으로 돌아가서. 왜 정가영이라는 배우이자 감독을 소개하고 싶었는가. 우리는 새로운 걸 좋아한다. 남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면 더 좋아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후추 30g이면 노예 한 명을 살 정도였듯이. 정가영 감독이 보여 주는 정가영 캐릭터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한 번만 자자고 조르고, 계량적으로는 영화에 나오는 표현대로 몸을 막 굴리는 여자겠지만 (‘비치 온 더 비치’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술 먹고 실수한 한 번을 빼고^^) 매 순간 진심이다.


처음부터 이유를 줄줄이 설명하지 않지만 조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도 나만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고 상대도 포함된. 심리적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섹스한 지 오래됐고 키스한 지는 더 오래된 물리적 이유 앞에서도 당당하다. 여자친구 있는 남자, 부인 있는 남자와 섹스를 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잘못 하는 것인 줄은 알고’ 하며 죄의식 없이 합리화에 급급한 극중 남자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늘 남자의 구애를 기다리고, 자신의 욕망은 감춘 채 남자의 욕망에 반응하는 기존 여성 캐릭터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기에 이성과 감정, 욕망과 솔직한 자기반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보다 중요한 건 이러한 현상이 아니라 그런 정가영 캐릭터와 그를 만드는 정가영 감독이 왜 한국영화 안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한때 이 가볍게 통통 튀는 영화에서 ‘의미’를 찾는 내가 잘못된 것인가 고민한 때도 있었지만, 감독 정가영은 배우 정가영과 함께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큰돈 들여 만드는 상업적 대중영화 안에도 걸크러시 캐릭터들이 있었지만, 남자의 시선에 비친 캐릭터였다. 여자가 만드는 실재 여자 사람에 가까운 여자 캐릭터. 못 보던 것이라 낯설고, 낯설어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의미 있는 건 남자들의 이상으로 구조화되고 비틀어진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우리도 이젠 그것을 ‘낯설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일 때가 됐다는 것을 일깨운다.


인생과 영화는 '관계' 안에서 ⓒ 영화 '하트' 스틸컷 인생과 영화는 '관계' 안에서 ⓒ 영화 '하트' 스틸컷

정가영 감독에 의해 배우 정가영의 몸을 빌려 탄생한 정가영 캐릭터는 뭇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준다. 보는 것만으로 웃음이 터진다. 또 감독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동안 남자 캐릭터들을 통해 보아 왔던 ‘남녀관계를 리드하고 지배하는 자’의 막무가내를 여자 배역을 통해 지켜보다 보면, 내가 얼마나 수동적이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나’라는 것은 비단 여자뿐이 아니다. 이 사회가, 숱한 미디어들이 규정하고 학습시키는 성 역할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건 여자나 남자나 똑같다는 걸 깨닫게 한다.


그렇다. 정가영은 여자 얘기를 하려는 감독이 아니다. ‘관계’, 그것도 좀 이상하게 뒤틀린 관계 속에서 현대인이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나약한지 고스란히 보여 준다. 그리고 쉼 없이 해결책을 찾아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뿐 아니라 감독으로서, 사회인으로서 해결책을 찾을 때도 당당하고 뻔뻔하다. 영화 속에서 실명으로 거장 이창동, 봉준호 감독을 거론하고 배우 조인성을 섭외하려 시도하다 그걸 영화로 만들기도 한다. 혹시 연애든 취업이든 사람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문제는 안고 있지만 어떻게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는 당신이라면 추천한다, 정가영의 영화.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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