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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일성 … ´코레아 우라!´


입력 2007.09.26 09:57 수정         김현 기자 (hyun1027@ebn.co.kr)

<데일리안 현장르포>´안중근 의사 발자취를 찾아´<3·끝> 중국 하얼빈~여순까지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 "만세 만세요, 대한독립이로다"

하얼빈 역 플랫폼에 있는 안 의사가 이토를 피격한 장소. 세모 모양의 표시가 있는 곳이 안 의사가 총격한 지점이고 네모 모양의 표시는 이토가 쓰러진 지점이다. 하얼빈 역 플랫폼에 있는 안 의사가 이토를 피격한 장소. 세모 모양의 표시가 있는 곳이 안 의사가 총격한 지점이고 네모 모양의 표시는 이토가 쓰러진 지점이다.
기차를 탄 지 10시간 정도 지났을까. 탐방단의 객실을 담당하던 승무원이 하차를 준비하라는 말을 전했다. 단원들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서둘러 각자의 짐을 챙겼다.

7월 17일 오전 7시 40분경. 탐방단은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 역에 발을 내딛었다. 하얼빈 역은 흐린 날씨 때문인지 탐방단의 무거운 마음 탓인지 모르지만 어두운 분위기였다.

1909년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 의사는 26일 오전 7시경 하얼빈 역에 도착, 플랫폼을 관찰할 수 있는 역사 내 찻집으로 들어가 동정을 살핀다. 안 의사가 바라본 하얼빈 역사 안팎은 러시아 군인들과 출영객 등이 가득차 혼잡했다.

이토가 탑승한 열차가 오기만을 기다린 지 2시간여. 오전 9시경 드디어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일본 추밀원 의장을 태운 특별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한다. 이토를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가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그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와 수행원들이 기차에서 내린다.

이토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안 의사는 이토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 채 “이 거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성공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찻집에서 나온다. 전날 일본 총영사가 러시아 군인들에게 통제를 하지 말라고 협조를 구한 탓에 안 의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토 일행에게 다가간다.

이토로 추정되는 인물은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한 뒤 외국영사단 앞으로 가 출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한다. 안 의사는 러시아 군대 뒤에서 이토로 추정되는 인물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그가 안 의사 앞을 지나가던 찰나, 안 의사가 품속에서 꺼내든 벨기에제 ‘브로우닝’식 권총은 그를 향해 3차례 불을 뿜었고, 그는 뭐라 몇 마디 중얼거린 뒤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안 의사는 총에 맞은 사람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위가 높아 보이는 일본인 인사들을 향해 4차례 더 총을 쏜다. 그 총에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등 3명이 더 쓰러진다. 이때가 오전 9시 30분경이다.

안 의사는 이토의 저격 직후 몰려드는 러시아 헌병들 힘에 밀려 넘어진다. 총도 떨어뜨린다. 그러나 안 의사는 곧장 일어나 그 자리에 서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달려드는 러시아 헌병에게 순순히 붙잡힌다.


탐방단이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역사적 의거지에서 안 의사가 어떻게 이토를 저격했는지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뒤에 있는 건물은 안 의사가 이토를 기다렸던 찻집이 있었던 역사 탐방단이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역사적 의거지에서 안 의사가 어떻게 이토를 저격했는지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뒤에 있는 건물은 안 의사가 이토를 기다렸던 찻집이 있었던 역사
탐방단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줄지어 이동했다. 5분 정도를 걸었을까. 조선족 출신인 가이드는 탐방단을 플랫폼 한켠에 멈춰서게 했다. 줄지어 오다 보니 한 곳에 뭉쳐 서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둥글게 모인 탐방단은 가이드의 입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플랫폼 주위를 둘러봐도 그곳에 멈춰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다른 곳과 똑같은 플랫폼이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바닥에 타일로 세모와 네모 모양이 7~8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표시돼 있다는 점 뿐이었다.

이윽고 가이드가 말문을 열었다. “이 곳이 안 의사님께서 민족의 원흉 이토를 사살한 역사적 현장입니다”라고. 단원들은 가이드의 말이 떨어지자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뭐야, 여기가 안 의사님 의거 장소라고?”, “뭐 이래.” 탐방단 여기저기서 너무나 초라한 안 의사 의거지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가이드는 “세모 모양이 있는 곳은 안 의사 총으로 이토를 저격한 지점이고, 네모 모양은 안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가 쓰러진 곳”이라면서 “이 표시도 작년에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가이드는 뒤를 돌아 대각선으로 20여미터 떨어져 있는 역사가 안 의사가 이토를 기다렸던 찻집이 있던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탐방단의 양금지(21세, 성균관대 국문학과 2년)양은 “우리나라에서 ‘하얼빈역’ 하면 안 의사를 떠올리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중국 사람들은 안내간판 하나 없을 정도로 안 의사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다”며 “나라의 위상이 많이 올라간 지금도 하얼빈 역에서 우리가 초라한 기분이 드는데, 식민지 치하에서 단신으로 이곳에 왔던 안 의사는 얼마나 더 초라함을 느꼈을까 생각이 든다”고 울분을 토했다.

탐방단은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없는 역사적 현장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으로 안 의사께 감사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묵념을 올렸다. 탐방단은 묵념을 마친 뒤 안 의사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을 간직한 채 하얼빈 역을 빠져나왔다. 하얼빈 역을 빠져나오는 내내 그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하얼빈역 광장은 중국의 10대 도시 중 하나라는 하얼빈시의 명성에 걸맞게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광장은 어디론가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들어가는 사람, 출구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단원들은 행여나 많은 인파로 인해 대열을 놓칠까 걸음을 재촉했다. 30여명의 탐방단 전체가 출구를 빠져 나오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탓에 허기를 느낀 탐방단은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뒤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후 수감됐던 일본 총영사관 터를 찾았다.

안 의사가 의거 후 러시아 헌병대에 붙잡힌 뒤 일본에게 이송돼 수감된 일본 러시아 총영사관 건물. 소학교로 변한 건물 한켠에 안 의사가 머물렀었다는 표지만이 안 의사의 흔적을 알리고 있 안 의사가 의거 후 러시아 헌병대에 붙잡힌 뒤 일본에게 이송돼 수감된 일본 러시아 총영사관 건물. 소학교로 변한 건물 한켠에 안 의사가 머물렀었다는 표지만이 안 의사의 흔적을 알리고 있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된 안 의사는 거사 당일 밤 11시경 일본 총영사관으로 이송된다. 당시 하얼빈시의 관할권을 갖고 있었던 러시아가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 안 의사를 일본 당국에 넘긴 것이다. 안 의사는 일본 총영사관으로 이송돼 11월 1일까지 6박 7일간 취조를 받는다.

안 의사가 취조를 받았던 일본 총영사관 터엔 이제는 소학교(초등학교)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 벽면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붙여진 표지가 안 의사가 머물렀던 흔적을 대신하고 있었다.

총영사관 터가 도심에 위치하고 있는 탓에 탐방단은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전에 서둘러 자리를 떠야만 했다. 탐방단이 이어 들린 곳은 안 의사가 하얼빈역 의거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검토했던 장소인 제홍교.

하얼빈역에서 불과 200~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홍교는 안 의사가 거사 하루 전인 25일 이곳에 서서 최종 거사위치를 확인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제홍교에 서자 하얼빈역 플랫폼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안 의사가 거사 하루 전 하얼빈역을 내려다 보며 최종 위치를 점검했다고 전해지는 제홍교(왼쪽)와 제홍교에서 하얼빈 역을 내려다본 전경(오른쪽). 안 의사가 거사 하루 전 하얼빈역을 내려다 보며 최종 위치를 점검했다고 전해지는 제홍교(왼쪽)와 제홍교에서 하얼빈 역을 내려다본 전경(오른쪽).
현지 가이드는 "제홍교는 안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후인 1926년 새로 건설돼 예전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다"며 "하지만 안 의사가 하얼빈 역을 바라봤던 그 위치 그대로에 설치돼 있어 지금 바라보는 하얼빈역의 전경은 안 의사가 봤던 것과 똑같다"고 소개했다.

문득 ‘안 의사가 하얼빈 역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아마도 이토 저격이라는 민족적 거사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불꽃같은 의지를 다짐과 동시에 떠나온 조국의 산천과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얼빈역 감상을 마친 뒤 탐방단은 안 의사가 거사를 앞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거닐었다는 하얼빈 공원(현 자오린 공원)을 둘러봤다. 그나마 하얼빈 공원은 안 의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도록 공원 한켠에 ‘청초당(靑草塘)’과 ‘연지(硯池)’라고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글을 새긴 유묵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마저도 지난해 들어섰다고 한다.

안 의사는 하얼빈 공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듯 했다.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사형집행 직전 두 동생들(정근·공근)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쟁해달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길 정도.

그러나 안 의사의 바람과는 달리 안 의사의 유해는 사형집행 후 하얼빈 공원에 묻히기는커녕 조국의 국권이 회복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묻혀있는지 조차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탐방단은 또 한 번 안 의사께 죄송함의 고개를 떨구어야만 했다. 언젠간 안 의사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가겠다고.
지금은 ´조린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하얼빈 공원의 정문 모습(왼쪽 위)과 안 의사 유묵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탐방단(왼쪽 아래). 하얼빈 공원 내에 세워져 있는 ´청초당´이라고 안 의사 지금은 ´조린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하얼빈 공원의 정문 모습(왼쪽 위)과 안 의사 유묵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탐방단(왼쪽 아래). 하얼빈 공원 내에 세워져 있는 ´청초당´이라고 안 의사

이후 탐방단은 조선민족예술관과 고려회관 내에 있는 안의사 기념관을 탐방했다. 특히 2004년 중국에서 최초로 안의사 기념관을 개관한 이후 2만여명이 관람한 고려회관엔 서울 구로구에서 후원회 만든 안 의사 동상이 놓여있었다.

조선족 출신인 고려회관의 한 관계자는 “우리들이 안 의사의 동상을 바깥에 세우려고 30년전부터 많은 노력을 했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고 회관 내에 설치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중국 당국이 일본의 항의 등을 우려해 안 의사 동상을 외부에 설치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난 해 3월 한국의 한 기업가가 안 의사 동상을 거리에 세우자 보름도 채 안 돼 중국 당국으로부터 철거 조치를 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얼빈시에 있는 중국 최초의  안 의사 기념관인 고려회관내에 있는 안 의사 동상. 서울 구로구에서 후원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얼빈시에 있는 중국 최초의 안 의사 기념관인 고려회관내에 있는 안 의사 동상. 서울 구로구에서 후원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세계 로봇학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홍만용 (하얼빈 공대 컴퓨터학과) 교수는 “비록 안 의사 동상이 바깥에 당당히 설치돼 있지 못하지만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하얼빈에 와 이곳에 있는 동상을 보고 아직도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는 일본 등의 국제정세 상황 속에서 안 의사의 인본주의와 국제주의 사상이 퍼져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드라마 ‘주몽’을 보면서 중국 교포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안중근’ 드라마를 하얼빈에서 찍어 세계가 시청하고 젊은 세대들이 안 의사를 알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얼빈 시에서의 첫날 탐방 일정을 마무리한 탐방단은 숙소인 흑룡강대 기숙사로 향했다. 탐방단은 재중교포인 김우종(78세) 전 흑룡강성 당 역사연구소장 등으로부터 안 의사의 사상과 의거 현장에 대한 고증을 들을 수 있었다.

김 전 소장은 특히 중국 내에서 동상 건립 등 안 의사 기념사업이 지지부진한 이유에 대해 “안 의사 기념사업을 주도적으로 벌이는 곳이 남한이기 때문에 안 의사의 본적지인 북한에서 중국 당국에 항의를 하는 것도 일정 부분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다음날인 18일. 서둘러 아침을 먹은 탐방단은 하얼빈에서 2시간여 거리에 있는 채가구(蔡家溝, 차이자거우)역을 방문했다.

안 의사는 독립운동가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신문 등으로 정보를 수집해 거사를 논의하던 도중 일본의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의 동청 철도가 엇갈리는 채가구 역에서 이토가 열차를 갈아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우덕순 조도순 등 안 의사 일행이 1차 의거지로 선정하고 이토 사살 거사를 준비했던 채가구 역의 모습. 우덕순 조도순 등 안 의사 일행이 1차 의거지로 선정하고 이토 사살 거사를 준비했던 채가구 역의 모습.
때문에 안 의사는 채가구 역을 1차 의거지로 정하고 우덕순과 조도선이 담당토록 하고, 하얼빈역을 2차 의거지로 해 안 의사가 의거를 진행키로 결정한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결국 거사 직전 적발돼 채가구역 지하실 방에 갇히게 되고, 안 의사는 거사에 성공한다.

탐방단이 한참을 헤매다 찾은 채가구 역은 이젠 열차도 제대로 서지 않는 간이역이 된 상태였다. 그래선지 채가구 역 대합실로 들어서는 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다. 우덕순과 조도선이 갇혔던 채가구 역 지하실은 역사적 유적지라고 보기엔 너무나 안타까울 정도로 거미줄과 쓰레기 더미로 가득했다.

지하실 입구가 쓰레기 더미 등으로 인해 너무 비좁은 탓에 탐방단 전체가 들어가 보진 못하고, 일부가 거미줄과 쓰레기 더미를 헤집고 들어가 쪼그려 앉아 사진 몇 장을 찍어오는 데 만족해야 했다. 탐방단 속에선 “여기가 쓰레기장이지, 유적지야”라는 말이 나돌았다.

채가구 역을 떠나온 탐방단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악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731부대를 찾았다. 하얀 꽃가루가 날리고 있는 731부대의 전경은 고통 속에 신음하며 죽어간 많은 이들의 넋이 서린 듯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덕순과 조도순이 붙잡힌 뒤 갇혀 있었다는 채가구역 지하실 내부. 유적지라고 할 수도 없이 쓰레기로 가득하다. 우덕순과 조도순이 붙잡힌 뒤 갇혀 있었다는 채가구역 지하실 내부. 유적지라고 할 수도 없이 쓰레기로 가득하다.
전시실에 들어선 탐방단은 생체실험을 하는 참혹한 장면과 생체실험 도구들을 보며 기겁을 했다. 탐방단은 “생체실험을 주도한 731부대 지도부들은 미군에 모든 생체실험 결과를 넘기는 조건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에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전시가 끝나는 지점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이 있었다.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세균실험 희생자 3000인이라는 동판은 코끝을 찡하게 했다. 이 같은 생체 실험을 통해 죽어간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많을까.

음산한 분위기의 731부대를 나와 탐방단은 한족 출신으로 안중근숭모회 하얼빈 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장현운(52세) 사장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 장 사장은 “안 의사는 세계적인 영웅이다. 어려운 상황에 이토를 격살한 용기와 담대함은 한국인 뿐 아니라 중국인 나아가 세계의 모든 사람이 기념할 바”라고 말해 탐방단을 감동케 했다.

저녁을 마친 탐방단은 안 의사가 감옥에서 수감되고 재판을 받은 여순(旅順, 뤼순)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단동(丹東, 단둥)으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탐방단은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여순으로 이송되면서 거쳐 갔던 기찻길을 그대로 따라 갔다. 안 의사의 기억을 더듬은 지 12시간 남짓. 여순이 속해 있는 대련으로 직행했던 안 의사와는 달리 압록강과 호산장성을 둘러보기 위해 탐방단은 단동에서 하차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해 있는 단동시는 개발붐에 탓에 상당히 발전된 모습이었다. 압록강 건너 북한 지역의 신의주와는 완연히 달랐다. 단동과 신의주는 압록강 철교로 이어져 있었다. 탐방단이 철교를 구경하는 동안에 신의주와 단동을 오가는 차량들이 들고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압록강 철교를 구경한 탐방단은 점심을 먹은 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전쟁에 대비해 세운 박작산성에 올랐다. 그러나 박작산성은 이미 중국의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호산장성으로 바뀐지 오래다. 중국은 이 성을 만리장성의 동단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안내판이며 큰 건물 모두에 호산장성이라는 간판을 붙여놓았다.

성을 걸어오른 탐방단은 우리 조상인 고구려인들의 위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압록강변에 위치해 있는 데다 험한 산성 지형에, 산성 정상에선 수십 킬로미터까지의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야말로 요새다운 곳이었다.

산성 주변은 10보도 채 안 되는 실개천을 사이에 놓고 중국과 북한의 국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한 들녘엔 한가로이 자전거를 몰고 가는 한 사람을 제외하곤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었다.

박작산성을 오르는 것으로 단동 일정을 마친 탐방단은 단동에서 4시간가량 거리에 있는 대련으로 향했다. 대련시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안 의사의 마지막 혼을 볼 수 있는 여순이 있다. 중국 요녕성(遼寧省, 랴오닝성) 요동(遼東, 랴오둥) 반도 남단부에 위치해 있는 군항도시인 여순은 안 의사가 수감돼 재판을 받았던 감옥과 법원이 있는 곳이다.

안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여순법원 재판정. 탐방단이 안 의사에 대한 영상물을 시청하고 있다. 안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여순법원 재판정. 탐방단이 안 의사에 대한 영상물을 시청하고 있다.
대련시에 도착해 저녁을 먹은 탐방단은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탐방단의 중국 탐방 마지막 날인 20일 아침. 탐방단은 여순 법원을 방문했다. 안 의사가 재판을 받은 여순법원은 중국 당국이 병원에 매각하려던 것을 한국의 한 재단이 매입,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안 의사는 여순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강압적인 일본 재판부 앞에서 단 한 번도 기개를 잃지 않고 심판관을 심판할 정도로 당당히 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안 의사는 공판에서 이토를 총살한 이유에 대해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라고 진술한다. 안 의사가 검찰 조사과정에서 서면으로 제출한 ‘이등의 죄악 15개조’를 거듭 강조한 것.

하나,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 한국의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 을사보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 독립을 요구하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체제로 바꾼 죄요 여섯, 철도·광산·산림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요 일곱, 일본의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의 경제를 교란한 죄요 여덟,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요 아홉, 민족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키고 식민지화한 죄요 열하나, 한국사를 말살하기 위해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요 열둘,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열셋,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엔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열넷, 대륙침략으로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열다섯, 일본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다

일본 재판부의 안 의사에 대한 재판은 일본 정부의 강압 때문에 형식적으로 끝난다. 신문과 변호, 구형 등이 일주일 안에 모두 종료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형식적이었는지 짐작된다. 안 의사는 선고공판 때 사형이 언도되자 “일본에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며 미소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곤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상고도 포기한 채 담대히 사형집행에 응한다.

탐방단이 방문한 여순 법원엔 당시 사용됐던 법정 도구들이 전시돼 있었다. 하지만 안 의사에 대한 영상물 전시를 제외하곤 안 의사는 중국의 항일 독립운동가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소개되고 있었다.

법원을 운영하는 한 관계자는 “안 의사만을 위한 전시관을 하려고 했지만, 중국 당국에서 중국인 항일운동가와 함께 (전시)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지금도 중국 당국에서 감독이 심하다”고 밝혔다.

탐방단은 여순법원을 둘러본 뒤 안 의사가 수감생활을 한 여순 감옥으로 향했다. 여순 감옥은 중국 당국이 감옥을 그대로 보존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여순 감옥 내에서 안 의사가 수감됐던 독방 내부(왼쪽)와 안 의사가 사형 집행을 당했던 곳의 모습(오른쪽). 안 의사가 사형 집행을 당한 곳은 안 의사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여순 감옥 내에서 안 의사가 수감됐던 독방 내부(왼쪽)와 안 의사가 사형 집행을 당했던 곳의 모습(오른쪽). 안 의사가 사형 집행을 당한 곳은 안 의사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감옥 본관동의 좁은 감방에는 당시 수감자들이 사용했던 식기, 짚신 등이 놓여 있었고, 감방동 한쪽에는 형틀, 수갑, 몽둥이 등 당시 고문에 사용됐던 도구들이 일제의 만행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안 의사가 수감됐던 방은 본관동 밖 간수부장 당직실 바로 옆에 마련된 독방. 벽에는 안 의사의 사진과 함께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 일본어로 안 의사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다. 감방 내부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방에는 안 의사가 사용했던 필기구와 책상, 침구 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안 의사가 사형 집행을 당한 곳은 다른 일반 사형수들이 교수형을 당한 곳이 아니었다. 안 의사만을 위해 별도의 공간에서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탐방단이 방문한 안 의사의 교수형장은 안 의사만을 위한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기념관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안 의사의 흉상과 교수형에 이용된 밧줄, 화분 등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탐방단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고 간 안 의사께 머리를 숙여 묵념했다. 안 의사의 흉상은 탐방단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탐방단은 여순감옥 탐방을 마지막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대련항에서 인천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30여명의 탐방단은 그간 안 의사가 행동으로 가르친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가슴 속 깊이 새긴 듯 했다.

탐방단의 기장을 맡았던 윤석범(25세, 건양대 공연의상과 3년)군은 "10박 11일간 안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면서 안 의사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며 "앞으로 안 의사의 가르침을 가슴깊이 새겨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으로 향하던 날밤. 선상에서 맞는 바람엔 안 의사가 거사 전 지은 자작시가 들려왔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에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에 뜻이 뜨겁다. 분주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동포이로다.

김현 기자 (hyun1027@e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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