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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방불 안 의사 유적지 … "건물만 겨우 보존"


입력 2007.09.12 10:04 수정         김현 기자 (hyun1027@ebn.co.kr)

<데일리안 현장르포>´안중근 의사 발자취를 찾아´<2> 중국 훈춘~백두산까지

"폐가 방불...어딜 가나 안 의사 유적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어"

탐방단은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중국의 여유로우면서도 까다로운 출입국 절차를 거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해 있는 훈춘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훈춘시는 25여만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서, 중국·러시아·북한의 접경지라는 지정학적 특성 탓에 지난 1992년 중국정부가 변경개방도시로 지정한 곳이다.

러시아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버스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고(왼쪽),  중국 훈춘 세관의 모습 러시아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버스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고(왼쪽), 중국 훈춘 세관의 모습
훈춘시의 이런 지정학적 특성은 우리 독립투사들이 항일독립전쟁을 펼치는 데 있어선 천예의 조건이었을 터.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선조 및 독립투사의 후손들인 조선족이 훈춘시 전체인구의 40%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게 어쩌면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안 의사도 훈춘시 인근에 자리한 권하(圈河, 취안허)촌에서 3개월간 머물며 독립군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등 독립투쟁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의 공장’이라 일컬을 정도인 중국의 거침없는 발전을 대변하듯 훈춘시 곳곳은 공사로 한창이었다. 도로를 포장하고, 헌집을 새로 짓는 등 마치 60~70년대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의식 수준은 중국의 성장속도에 보조를 맞추진 못하는 듯 했다. 쓰레기가 아무런 부끄럼 없이 쌓여져 있는 거리를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고, 도로의 차들은 마치 카레이스를 하는 듯 너나 할 것 없이 추월 경쟁하기 일쑤였다.

탐방단을 태운 버스는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카레이스 수준의 속도감으로 1시간 가량을 달려 중국·러시아·북한의 경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방천 지역을 찾았다. 유엔이 지정한 습지자연보호구인 방천은 3국의 국경을 모두 볼 수 있어 일명 ‘동북아 금삼각’이라고 불리운다.

방촌 지역 ´망해각´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전경. 조-러 철교를 기준으로 왼쪽은 러시아, 오른쪽은 북한, 그 아래는 중국이다. 방촌 지역 ´망해각´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전경. 조-러 철교를 기준으로 왼쪽은 러시아, 오른쪽은 북한, 그 아래는 중국이다.
탐방단장인 김광시(64세) 안중근숭모회 사무처장은 “3국의 접경지대인 방천의 이 같은 지리적 특성은 안 의사 등 많은 독립투사들의 효과적인 독립전쟁 수행에 있어 발판이 됐다”고 설명했다.

‘국가급 풍경명승지(國家級風景名勝地)’인 방천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망해각’이라는 전망대가 있었다. 탐방단도 건물 3층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 안 의사가 독립전쟁을 벌이며 넘나들었을 3국의 접경지역을 바라봤다.

전망대 좌측은 러시아 땅으로 커다란 호수가 있었고, 우측엔 우리 민족의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과 그 너머에 북한 땅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망대 정면엔 중국 땅의 끝자락과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조-러철교가 있었다.

탐방단은 방천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권하촌 초가를 찾았다.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기 1년 전인 1908년 4~6월경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이 초가는 방 하나에 마루와 부엌이 연결돼 있는 작은 집이었다. 집 옆에 심어진 앵두나무의 빨간 열매는 단지동맹을 맺으며 흘린 안 의사의 뜨거운 피를 연상케 했다.

안 의사가 하얼빈 의거 1년 전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는 권하촌 초가의 모습. 안 의사가 하얼빈 의거 1년 전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는 권하촌 초가의 모습.
그러나 안 의사의 초가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폐가를 방불케 했다. 정면에서 봤을 때 초가의 오른쪽 지반이 침하돼 집 전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문에 발라진 창호지 대부분은 여기 저기 찢겨 있었다. 집 경계 울타리도 빠진 이처럼 듬성듬성 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비문과 길을 깔끔하게 정돈해 놨다는 것, 안 의사가 머물렀던 작은 방에 안 의사 사용했을 허름한 옷장과 철 침대 하나 그리고 안 의사의 사진 몇 장이, 마루엔 안 의사 영정이 외롭고도 쓸쓸하게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초가의 건물은 권하촌의 상급 행정기관인 경신진과 훈춘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무보수로 동네 주민 중 한명을 관리인으로 두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버지 대를 이어 초가 관리인을 맡고 있는 최금화씨는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리 많지 않다. 7~8월에 역사나 통일 기행하는 대학생들 위주의 관광객들이 다녀갈 뿐”이라며 “관광객들의 모금으로 건물만 겨우 보존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안 의사가 머물렀다는 방 내부(왼쪽) 부엌으로 연결되는 마루의 모습(오른쪽 아래), 지반침하로 기울어져 있는 초가의 모습(오른쪽 위) 안 의사가 머물렀다는 방 내부(왼쪽) 부엌으로 연결되는 마루의 모습(오른쪽 아래), 지반침하로 기울어져 있는 초가의 모습(오른쪽 위)


한국에서 건너와 권하촌 인근에 거주하며 수행을 하고 있다는 만우스님은 “관리인이 무급인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무급이니 얼마나 성심성의껏 관리를 하겠느냐”고 지적했다. 탐방단의 이유진(23살, 대구대 무역학과 3년)양도 “러시아에서도 느꼈지만, 어딜 가나 안 의사의 유적지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하촌에서 훈춘시 도심으로 돌아온 탐방단은 숙소에 도착, 중국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탐방단 중 일부는 첫날밤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숙소 인근에 있는 야시장 등을 구경하기도 했다.

다음날 탐방단은 도문시로 이동, 도문대교를 찾았다. 도문대교는 ‘국문’ 전망대 등을 통해 북한의 남양시를 바라볼 수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100m 길이의 도문대교 중간엔 빨간색(중국)과 파란색(북한)으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도문대교 아래엔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만강 물은 맑고 깨끗함을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탁했고, 쾌쾌한 냄새까지 났다. 중국 탐방의 안내를 맡은 가이드는 “두만강 상류 부근에 있는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 때문에 두만강은 오염됐다”며 “그래서 두만강에서 잡히는 생선은 중국에선 매우 싼값에 팔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탐방단이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잇는 도문대교 위의 중국 경계가 표시돼 있는 지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탐방단이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잇는 도문대교 위의 중국 경계가 표시돼 있는 지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민족의 한을 담고 흐르는 두만강의 씁쓸한 현실을 뒤로한 채 탐방단은 용정시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창밖을 보니 북한 지역의 이름모를 산 중턱에 ‘21세기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고 쓰여진 커다란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분단의 현실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했다.

북한 지역의 산들은 대부분은 화전으로 일군 듯 나무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이 온통 옥수수가 심어져 있었다. 북한의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듯 했다.

인구 35여만명 중 70%가 조선족인 용정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널리 알려진 민족시인 윤동주의 모교인 대성중학교와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이 있는 곳이다.

탐방단이 용정시에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대성중학교. 현재 동흥, 영신 등 여러 중학을 통합하면서 ‘용정중학교’로 명칭이 바뀐 대성중학교는 옛터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건물만이 남아 있었다. 건물은 원래의 대성중학의 교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교사를 허물기 전까진 교무실로 이용됐지만 지금은 역사전시관으로만 활용되고 있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모교인 대성중학 건물의 모습. 민족시인 윤동주의 모교인 대성중학 건물의 모습.
전시관엔 식민지 교육, 차별화 교육 등으로 민족의 뿌리를 뒤흔들려는 일제에 맞서 민족의식 함양을 위한 민족 교육에 힘쓴 선조들에 대한 기록과 용정중학교로 통합되기 전 여러 중학들의 역사가 설명돼 있었다. 이곳에서 돈의학교 등을 설립해 민족교육에 힘썼던 안 의사에 대한 기록도 찾아 볼 수 있었다.

탐방단은 빡빡한 일정 탓에 서둘러 대성중학교를 나와 일송정과 해란강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향했다. 버스로 도로를 달린지 5시간여 정도. 탐방단을 태운 버스는 이미 세상에 어둠이 깔린 뒤에 백두산 자락인 안도현 장백산(중국에서의 백두산 명칭)관광경제개발구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6일 아침. 탐방단은 백두산에 오른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아름다운 절경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버스에서 멋진 풍경을 감상한 지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버스는 백두산 입구 주차장에 들어섰다.

백두산(장백산) 매표소 앞에서 입장권을 산 뒤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이후 중국 공안이 현수막을 펼치고, 특히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현수막을 몰수했다. 백두산(장백산) 매표소 앞에서 입장권을 산 뒤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이후 중국 공안이 현수막을 펼치고, 특히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현수막을 몰수했다.
주차장에 내리자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중국 상인들이 한국인 관광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흐린 날씨 탓인지 ‘비옷’을 파는 장사치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이 부르는 ‘비옷’ 가격은 주차장에서 20위안, 다음엔 10위안, 백두산 매표소 근처에선 5위안까지로 할인됐다. 중국에선 ‘장사치들이 처음 부르는 가격대로는 절대 사지 말라’는 어느 관광객의 말이 떠올랐다.

매표소에 이르자 보인 ‘장백산’이라고 적힌 건물은 탐방단의 마음에 뭔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탐방단은 중국의 ‘동북공정’ 등 역사 왜곡과 관련된 가슴 아픈 현실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매표소 앞에서 입장권을 구입한 뒤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 펼쳤던 현수막에 단지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 있던 중국 공안에게 현수막을 ‘몰수’ 당한 것.

‘장백산에선 현수막을 펼치고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자치주 규정 때문이라는 게 공안의 주장. 이 때문에 한참을 공안과 실랑이를 벌이다 ‘백두산을 다녀온 뒤 돌려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고서야 탐방단은 백두산 등정에 나섰다. 하지만 결국 중국 공안은 현수막을 돌려주지 않았다.

백두산 주변에 사는 한 조선족은 “그런 규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유독 한국인들에게만 적용하는 것 같다”면서 “한국인들이 장백산(백두산)을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데 대해 중국 당국에서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들어낸 장백폭포의 절경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들어낸 장백폭포의 절경
이 같은 우여곡절 겪은 탐방단은 천지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팀과 몸이 불편해 지프차로 이동하는 팀으로 나뉘어 백두산 등정을 시작했다.

걸으면서 보이는 기암절벽, 맑은 물, 곳곳에서 나오는 온천수 등 백두산의 풍경은 탐방단의 입을 절로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 중에 장백폭포는 그야말로 절경 중에 절경이었다. 많은 인파들은 장백 폭포의 절경에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

30여미터 정도를 곧게 쏟아져 내린 폭포수는 바위와 부딪혀 물보라를 만들어 주변이 안개가 낀 듯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폭포수 주변엔 지난 겨울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쌓여 있기도 했다.

장백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은 매우 시원해 손을 담그자 한 여름의 더위가 씻겨 나가는 듯 했다. 한동안 폭포수 근처 있다 보니 한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탐방단 중 일부는 이 같은 절경을 갖춘 장백폭포가 중국 영토에 속해 있다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탐방단의 현성일(20세, 세명대 생활체육과 1년)군은 “장백폭포가 이렇게 크고 웅장할 줄은 몰랐다”며 “이런 장백폭포가 우리 영토가 아닌 중국 영토에 있다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백두산 천지의 모습. 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 천지의 모습. 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장백폭포 옆엔 천지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오르자 천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탐방단이 도착한 천지는 백두산 신령이 부끄러웠던 탓인지 하늘에서 비를 흩뿌리며 안개를 몰고 와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때문에 천지를 병풍처럼 둘러싼 16개의 봉우리를 보고 싶어했던 탐방단은 민족의 성지인 천지에 손을 담궈 보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탐방단 가운데선 "안 의사도 천지에 와서 물에 손을 씻은 적 있을까"라는 궁금증 어린 질문들이 나오기도 했다. 30여년의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치열한 독립투쟁에 헌신했던 안 의사도 언젠가 한 번쯤은 이곳 백두산에 올라 천지에서 손을 씻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굳은 결의를 다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백두산 내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을 끝으로 백두산 일정을 마무리한 탐방단은 안도현으로 이동, 안 의사의 이토 저격 의거지인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탐방단은 백두산을 오르는 등 탐방 기간 동안 쌓인 피로 탓인지 대부분 열차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었다.

김현 기자 (hyun1027@e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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