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과 화해의 중간에서 택한 ‘열린 결말’
사랑과 가정의 의미에 대한 김수현식 정의
결국 마지막까지 이렇다 할 반전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권선징악이나 비극적인 신파에 집착하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을 보여준 드라마의 선택은 선정적으로 흐르기 쉬운 기존 불륜드라마의 진부한 공식을 과감히 탈피한 완성도로 오히려 공감을 얻었다.
안방극장에서 폭발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SBS<내 남자의 여자>가 지난 19일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최종회에서 지수(배종옥)과 화영(김희애), 준표(김상중) 세 주인공은 결국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우유부단한 준표에게 지친 화영은 결국 일방적인 결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지수는 준표와 재결합하지도, 새로운 사랑에 기대지도 않고 자립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길을 선택한다.
<내 남자의 여자>는 아내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남자, 친구의 남편을 뺏은 여자라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화제를 모았다. 얼핏 익숙한 불륜 드라마의 전형처럼 보이는 스토리가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이 불륜이나 인물간의 갈등구도를 단순히 선정적으로 담아내는데 치중하지 않고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김수현 작가의 세계 속에서 선악의 기준이나 등장인물들의 감정변화는 쉽게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다. 화영은 도도한 악녀지만 오로지 사랑 하나만을 믿고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순정파이기도 하다. 유약한 준표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우유부단함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긴다. 지수 또한 자신을 배신한 준표와 화영을 원망하면서도 온전히 미워하지도 못한다.
<내 남자의 여자>는 결국 불륜드라마의 형식으로 돌아본 ‘조강지처 예찬론’이다. 그러나 화영은 준표의 사랑을 차지하고도 결국 온전히 소유하지는 못했다. 지수의 음식, 지수의 내조, 지수의 모성에 길들여진 준표의 ‘습관’은 불륜의 위험한 열정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절대적인 한 부분임을 보여준다.
‘누가 뭐라든 내가 아니면 그만이야’라고 일축하는 화영의 독불장군식 행보와 달리, 세상은 온통 지수의 편이다. 지수의 일이라면 앞장서서 육탄전도 불사하는 언니 은수(하유미)의 열렬한 자매애, 불륜을 저지른 자식을 옹호하지 않고 끝까지 며느리의 편이 되어주는 이성적인 시부모. 상처받은 지수의 옆에서 묵묵히 힘이 되어주는 연하남 등은 지수의 입장에 몰입한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비록 남편은 잃었지만 지수는 품위를 잃지도 경제적으로 곤궁해지지도 않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는다.
또한 김수현 작가는 가정의 평화를 무너뜨린 불륜커플을 가장 현실적인 수단으로 응징하지만 결코 파멸시키지는 않는다. 준표는 결국 화영에게 버림받지만 기존 불륜드라마처럼 사회적으로 완전히 몰락하는 것은 아니다. 화영 역시 결국 원래 있었던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지수와 준표는 이성적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갈 것을 합의하지만, 아들이라는 영원한 매개체와 서로에 대한 연민을 확인하며 여운을 남긴다. 복잡다단한 인생사에 있어서 애증의 순환과 불확실성은 인간의 힘으로 결코 쉽게 단정지을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성숙한 기존 캐릭터에서 위험한 불륜녀로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을 보여준 김희애와 현모양처 캐릭터를 호연한 배종옥의 ‘역발상 캐스팅’, 우유부단한 지식인 캐릭터로 절제된 연기를 보여준 김상중, ‘국민언니’라는 지지를 받았던 하유미와 코믹한 감초 역할의 김병세 등 중견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는 극에 시너지효과를 불어넣었다.
다만 한편으로는 드라마가 소시민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여성의 자립과정같은 현실적인 일상의 딜레마는 거세된 ‘중산층 이야기’라는 한계, 때로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지수의 캐릭터. 다소 애매했던 조연들의 비중. 파격적이던 도입부에 비하여 후반으로 갈수록 사실상 별다른 에피소드없이 극적 긴장감이 떨어졌던 부분 등은 ‘옥에 티’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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