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 300년 심포지엄 국내최초로 개최 "조선 건축의 정수 파괴돼"
행궁 일제의 소실 아닌 폭우로 멸실, 성벽 발굴조사 없이 보수복원
북한산성이 축성 300년 만에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지난 28일, 경기문화재단(대표 권영빈)은 재단 3층 다산홀에서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 김병만 경기도청 문화재 팀장 등 2백여명의 방청객들이 자리를 메운 가운데 성곽전문가들을 발표자 및 토론자로 초빙해 북한산성을 주제로 한 국내최초의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북한산성은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관련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국민들에게도 등산 코스로만 알려져 역사적인 사실이 제대로 홍보되지 않았다. 이에 경기문화재단에서는 국가의 보장처로 유서 깊은 북한산성내 문화재, 행궁 등의 발굴과 조사연구를 근거로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국민들이 즐겨 찾는 역사문화 명소를 만들고자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날 1부 심포지엄은 ‘북한산성의 역사적 가치’(경기대 이재범 교수) 와 ‘북한산성의 구조와 시설물’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운영부장) ‘북한산성 행궁정비·복원과 활용’ (허미형 경기문화재연구원) ‘북한산성의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정영선 브랜드스토리 이사) ‘북한산성의 관광자원’ (김흥식 경기개발연구원)등의 주제발표로 이어졌다.
첫 번째 발표자인 이 교수는 “북한산성은 그동안 학문적 접근보다는 관광레저로 더 알려졌으며, 이번에 고서자료를 조사하던 중, 산성에서 다양한 역사적 가치를 발견했다” 고 밝혔다.
그는 “최초축성이 백제라는 설이 있으나 당시의 성벽위치가 현재 장소로 보기에는 의문스럽지만 산성 위치가 불명해도 북한산 일대가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지임은 진흥왕순수비로 입증이 된다.”고 했다.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중요성 보다는 종교, 문화적 공간, 때론 피신처로 이용됐다고 했다.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하자 고려 태조의 재궁을 향림사로 옮겼으며, 현종은 자신을 죽이려는 천추태후를 피해 신혈사에 기거하기도 했다. 또한 고려왕실은 북한산에서 기우제를 자주 지냈으며, 사찰에 머물면서 백성들에게 물품을 하사했다는 <삼각산명당기> 기록도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다시 변화가 생긴다. 도읍을 북한산아래 정한 후 수차에 걸쳐 유사시 북한산을 배후성으로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번번이 미뤄지다가 숙종 37년(1711)에 임금의 단호한 결정으로 현재의 북한산성이 탄생됐다.
축성공사는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 교수는 “당시 여러 대신들이 북한산에 축성하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를 했다. 도성과 너무 가까이에 있으며, 성내부 공간도 좁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숙종은 성벽을 쌓을 석재가 풍부하며, 산세가 험준해 적의 침입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속하게 성을 쌓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를 숙종이 택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토지박물관 심광주 부장은 “북한산성은 조선후기 토목건축기술의 정수를 볼 수 있으며, 축성은 도성수축을 맡았던 삼군문에서 담당해 견고하다. 성벽은 현재까지도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 북한산성에서 일부 복원구간을 보면 기존의 축성법과 모양이 다른 형태로 성벽과 여장이 정비되고 있어 원형훼손이 심각한 실정”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정밀한 고증 없이 성벽과 여장이 한양도성의 여장처럼 네모반듯한 사고석으로 구축되고 원래 없었던 미석까지 설치되는가 하면 정연하게 다듬은 일체형의 옥개석이 올려지고 있다고 혹평 했다. 또한 총안바닥과 타구바닥에도 강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원형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 재고돼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북한산성은 전체 측량조사가 한 번도 없었다. 측량 후 잔존성벽의 현황과 유적지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지도 작성도 시급하다. 그 후 북한산성에 대한 정밀 학술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산성 내에 있었다는 사찰과 누각, 창고 터, 그리고 고려시대 쌓았다는 중흥산성 터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부장은 “성벽복원 전에 해당지역의 발굴조사가 이뤄져야 하는데도 지금까지 4.5km 넘는 구간에서 성벽과 성문, 여장복원공사가 실시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발굴조사가 없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허미형 경기문화재연구원은 “행궁은 일제강점기 때 불에 타 사라진 줄로 알려졌는데 시굴조사결과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폭우나 민간에 의해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산성에는 급한 계곡이 많은데 원래 계곡물이 행궁 밖으로 나 있었으나 폭우로 인해 배수로가 행궁중심으로 관통한 사실도 밝혀냈다. 그로인해 현재도 행궁전역이 흙속에 묻혀있다
시급한 것은 행궁으로 난 물길을 외곽으로 돌려야 하며, 행궁주변 잡목도 제거해야만 더 이상의 훼손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허 연구원은 “북한산성을 호국탐방코스로 만들어‘산속으로 옮긴 한양도성’ 산성에서 철거한 민가에는 주막거리로 정비하면 관광객들에게 좋은 호감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브랜드스토리 정영선 기획이사는 “북한산성은 남한산성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데, 즉 남한산성은 국왕의 피난처였다면 북한산성은 굳건하게 싸운 ‘호국의 방파제’ 로 자연 지세와 더불어 남성미가 듬뿍 스며있다”고 발표했다.
북한산성의 역사를 전문가 입장에서 홍보하지 말고 대중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며, 특히 승병들과 산성에 스며있는 무수한 이야기를 들춰내 책을 만들어 홍보를 하는 것이 북한산성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라고도 했다.
김흥식 경기개발연구원은 “북한산성을 유교문화와 연계할 필요가 있다. 항공편으로 3시간 반 거리에 동북아 권역 내 10억 인구의 대규모 관광객을 흡인 할 수 있는 위치에 북한산성이 있으며, 한민족 정신문화벨트(서원, 향교, 왕릉)와 한민족 성곽유적(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성곽, 보루)을 연계한 ‘1천년 경기제‘ 를 기념하는 대규모 축제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부에서는 강진갑 경기문화재단 연구실장이 좌장을 맡아 최병기 북한산국립공원과장, 정동일 고양시문화예술과 전문위원, 이천우 문화재청 전문위원, 노현균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문화유산팀장 등이 참여해 토론을 벌여 연간 1천여만 명이 탐방하는 북한산성이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산성으로서 역할보다는 국립공원으로만 인식돼 있어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북한산성은 ‘산속으로 옮긴 도성’으로 성문 14개, 연못 26개, 우물 99개, 문수봉 남장대, 노적봉 북장대, 대동문 동장대 등 전투 지휘본부격인 장대도 3곳을 가동하고 있었다. 대동문, 대남문, 대서문 등 산성의 대문 명칭은 한양의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의 앞뒤 글자만 바꿨을 뿐이어서 유사시 임시수도가 북한산성이 될 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산성안의 행궁도 기타의 행궁과는 그 격을 달리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단 관계자는 "심포지엄을 통해 등산의 대상인 북한산을 역사와 문화재가 깃든 현장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며, 경기도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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