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요구' 외면한 조선 말기, 결말은 국권 상실이란 비극
다시금 선택 기로 선 李정부, 한미관계 이상신호에 불안감만
외교 피해는 국민 몫…'野 비판' 충분히 경청했는지 돌아봐야
이재명 대통령이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권력이 듣기 싫은 소리에 귀를 닫아 온 역사는 유구하다. 조선 말기만 보더라도 고종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외면한 끝에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을 막지 못했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저물고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지금 다시금 역사의 선택의 기로에 선 이재명 대통령 역시 과거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의문이 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은 더욱 가중됐다. 자국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 기존 외교 문법만 고수해서는 실익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어느 방향을 택하든 적잖은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정부의 판단 하나하나가 곧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엄중한 시점이다.
특히 한미동맹을 토대로 안보와 경제 협력을 이어 온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는 결코 가볍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철저히 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협상가였고, 그에게 한국식 '정(情)'을 기대하며 우리 정부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해 주기만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근 불거진 일련의 논란들은 이러한 우리의 위태로운 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종석 국가정보원장의 방미 거부설, 국정원 직원들의 미국 비자 문제,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미국 입국 비자 발급 보류가 대표적이다. 사안마다 원인과 성격은 다르지만 의문이 잇따르면서 국민들의 불안감은 한층 커지고 있다.
그간 정부의 대북정책과 외교·안보 기조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야권은 이번 한미관계의 이상 신호를 계기로 공세의 수위를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이는 정부가 친중·친북 편향에서 벗어나 현 상황의 엄중함을 직시하고 외교·안보 정책 전반을 시급히 재점검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조언이기도 하다.
정부 역시 곳곳에서 감지되는 이상 신호를 더는 외면하기 어려웠는지,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음을 사실상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실용주의'와 '국익 최우선'이라는 허울 좋은 담론만 되풀이하고 있단 점이다.
물론 정부의 처지가 녹록지 않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는 그 누구에게도 대단히 까다로운 방정식이다. 안보는 한미동맹에 기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니 어느 한쪽의 요구만 따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속에서 정부 나름의 전략적 판단과 고심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혹한 외교적 환경이 정부의 판단에 대한 책임까지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시기일수록 정부는 스스로의 판단이 옳은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미국의 전략적 움직임이 외교·안보에 미칠 파장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한편 야당의 경고 중 타당한 지적은 전향적으로 정책에 반영해야 마땅하다. 판단이 빗나갔을 때 그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그간 야당의 비판을 충분히 경청했는지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의 교훈은 지극히 명확하다. 변화의 신호를 읽지 못하고 내부의 경고마저 외면하면 위기는 커진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역사 속에서 뼈저리게 겪어온 바 있다. 모든 비판을 수용할 필요는 없지만 무엇이 국익에 부합하는지 냉정히 가릴 수 있는 통로만큼은 열어둬야 한다. 다른 진영에서 나온 목소리라는 이유로 배척하면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마저 잃게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선서에서 "통합은 유능의 지표이며, 분열은 무능의 결과"라고 말했다.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파고 앞에서 대한민국은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배척하는 편가름의 정치가 아니라, 따가운 비판 속에서도 진정한 국익을 발굴하고 국민적 역량을 하나로 모아내는 포용의 정치다. 이 대통령이 취임 당시의 다짐을 되새기며 진정으로 모두의 대통령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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