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감정을 맡기진 않았다…청년층 '감정 대행'의 5년 [Now 2.30]

민단비 기자 (sweetrain@dailian.co.kr)

입력 2026.08.22 09:30  수정 2026.08.22 11:15

사과부터 퇴사까지 대신 전해주던 '감정 외주'

한때 주목받았으나 시장은 사실상 명맥만 유지

이별은 일부 수요 남았으나 나머지는 자취 감춰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 사무실에 낯선 남자가 나타나 한 직원의 퇴사를 대신 처리하겠다고 한다. 퇴직 서류와 퇴직금까지 챙기겠다는 남자의 말에 상사는 당황한다. 잠시 뒤 나타난 퇴사 직원은 상사와 직접 대화하는 대신 대행 직원의 귓속말을 통해 그간의 불만을 털어놓는다. 상사는 분노하지만 직원은 끝까지 대행 직원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 채 사무실을 떠난다. 코믹숏무비 유튜브 채널 '너덜트'의 콘텐츠 '뭐든 대신 해드립니다'의 한 장면이다. 이 콘텐츠는 500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미안하다는 말, 헤어지자는 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 직접 꺼내기 어려운 감정을 대신 전해주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2020년 전후로 등장한 퇴사·이별·사과 등 감정 대행 서비스는 비대면 시대의 새로운 산업으로 주목받았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 전달하는 대신 제3자에게 맡긴다는 의미에서 ‘감정의 외주화’라는 이름도 붙었다. 갈등을 피하고 싶거나 상대방의 반응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대행 서비스는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감정 대행 서비스가 등장한 배경에는 비대면 소통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도 영향을 미쳤다. 온라인 메신저를 통한 소통이 일상이 된 세대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특히 퇴사처럼 관계에 대한 책임과 예의를 함께 짊어져야 하는 상황에서는 직접 말하는 일이 더욱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수요를 겨냥해 감정 표현 자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서비스가 등장한 것이다.


너덜트 유튜브 채널 '뭐든 대신 해드립니다' 영상의 한 장면. 현장대행 업체 직원이 고객 대신 상사에게 대신 퇴사 통보를 하고 있다.
'감정의 외주화', 5년 뒤


감정 대행 서비스가 등장한 지 약 5년이 지난 지금, 2030 세대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정을 대신 전해달라고 할까. 취재 결과 시장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거 역할대행 시장이 애인·친구·가족 등 관계를 대신하는 ‘감정 대행’에 집중됐다면, 최근에는 상황을 대신하는 서비스로 전환된 모습이다.


검색 상단에 노출되는 한 A 종합 대행 업체 관계자는 "지금은 결혼식 하객 대행 정도만 하고 있다"며 "사과나 퇴사 대행은 홈페이지에 띄워놨었는데 그런 쪽으로는 솔직히 연락이 안 온다"고 말했다. 이어 "하객 대행도 요즘 결혼식을 많이 안 하는 추세라서 가끔씩 하고 있어서 사실상 폐업을 준비 중"이라고 덧붙였다. B 대행 업체 관계자 역시 퇴직 대행에 대해 "흔하게 들어오는 요청은 아니다"라고 했다.


한때 새로운 서비스로 주목받았던 감정 대행이 시장으로 자리 잡지 못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비용이 걸림돌이다. A 업체에 퇴직 대행 비용을 문의한 결과 전화 대행은 15만~20만 원, 방문 대행은 20만~25만 원 수준이었다. B 업체의 이별 대행은 전화 대행 20만 원, 대면 대행 48만 원이었다.


B 업체 관계자는 “가격이 부담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하다”고 말했다. 잠실에 사는 30대 정모씨는 "심리적인 에너지를 아끼면서 관계를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것 같다"면서도 비용을 알게 되자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고 말했다. 감정을 대신 전달하는 일이 편리하더라도 그 대가로 수십만 원을 지불할 만큼 절실한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퇴사 대행의 경우 서비스에 대한 수요 자체가 크지 않았던 점도 한계로 꼽힌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대면 소통을 어려워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수요가 있을 수 있지만, 서비스 비용을 고려하면 직접 퇴사 의사를 전달하는 것과 비교해 이용할 유인이 크지 않았을 것”이라며 “최근에는 취업 자체가 어려워 퇴사를 원하는 사람들의 규모도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과 대행 역시 서비스 필요성이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과는 전화나 문자 등 비대면 방식으로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어 굳이 비용을 들여 제3자에게 맡길 유인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비용과 수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지점도 있다. 비대면 소통에 익숙한 젊은 세대라고 해도 회사처럼 공적인 관계에서는 여전히 직접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퇴사를 나 대신 누구에게 시키는 것이, (퇴사 의사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너무 성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아무리 면대면을 싫어하는 세대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는 태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소통 방식은 기성세대와 달라졌지만, 공적인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은 여전히 이전 세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는 설명이다.


퇴사는 사라졌는데, 이별은 왜 남았을까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감정을 대신 전해주는 서비스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퇴직 대행과 달리 이별 대행은 상대적으로 수요가 남아 있다. C 종합대행 업체 관계자는 "요즘 세대들은 이별에 서툴어서 이별 대행은 많이 이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실제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행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25년 C업체를 이용한 한 이용자는 "타 업체 몇 군데를 이용했을 땐 연기력이 부족해 난감한 상황도 벌어지곤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같은 감정 대행인데 차이가 나는 이유를 이별과 퇴사가 갖는 감정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임 교수는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가장 힘든 것이 이별이다. 가족과의 사별 스트레스 지수가 제일 높고 연인과의 이별도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원인 중 하나다. 퇴사보다는 이별이 감정 소모가 크기 때문에 이별 대행 서비스는 젊은 세대들이 적극적으로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곽 교수도 "퇴사와 달리 이별은 감정 정리는 내 마음대로 잘 안 되기 때문에 제3자에게 맡겨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직장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이별은 감정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비대면으로 소통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해서 모든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는 않았다. 퇴사처럼 공적인 관계에서 책임과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일은 여전히 직접 말해야 할 몫으로 남았고, 이별처럼 혼자 감정을 정리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제 3자의 도움을 찾았다. 소통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감정을 대하는 방식까지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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