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9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사저에서 수심 깊은 표정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검찰의 칼끝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겨누면서 정국은 살벌지성(殺伐之聲)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소환 금기(禁忌)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끝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왔지만 이번에 깨졌다.
그만큼 충격의 여파가 막대하다. 대통령의 측근들과 친인척들의 감옥행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이번 검찰 수사는 노 전 대통령 부부 모두를 향하고 있어 더욱 충격적이다. 전직 대통령 부인에 대한 검찰소환이 전례가 없는데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 부부가 모두 사법처리를 받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60년 현대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길 수도 있다.
검찰수사에 ´원칙론´ VS ´현실론´ 맞서
검찰수사를 지켜보는 시각은 제각각이다. “검찰수사에 성역은 없어야 한다. 대통령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원칙론부터 “YS 이후에도 대통령이 권력형 비리사건의 ‘몸통’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인데 굳이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고 망신을 줄 필요가 있느냐”는 현실론까지 다양한 견해들이 맞서고 있다.
그래서 이번 검찰수사를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다. 검찰이 전직 대통령 소환이라는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번 사태가 미칠 파장은 간단치 않다.
제일 먼저 나오는 얘기는 검찰의 독자적 판단으로 감행된 수사라는 것이다. 검찰이 이것저것 고려치 않고 비리혐의가 나오는 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다. 검찰 핵심관계자 역시 이번 수사와 관련 “나오면 나오는 대로 수사하겠다”고 말했었다.
지난해 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탈세혐의를 수사할 때 이런 결과물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 검찰 측의 설명이다. 검찰은 여권 실세나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는 것을 들어 특정 타깃을 정해놓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정권교체 뒤 ‘씻김굿’… MB, ‘여의도정치 불신’도 한몫
두 번째는 정권교체 때마다 벌어지는 검찰의 정기적 ‘씻김굿’으로 보는 시각이다. 역대 정권을 보면 정권이 바뀐 후 어김없이 검찰의 칼날이 전 정권 핵심으로 향했다. 특히 여야가 뒤바뀌는 정권교체의 경우 앞선 정권과의 차별화, 도덕적 우위 등을 내세우기 위해 ‘전 정권 손봐주기’ 차원에서 검찰 수사가 진행된다.
김경한 법무장관이 6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나와 “수사라는 게 어차피 과거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서 “정권이 바뀌면 과거 여러 가지 은폐됐던 단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 번째는 이명박 대통령의 여의도 정치 불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로 대변되는 국회가 ‘하는 것 없이 정쟁만 일삼는’ 비효율적 집단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다. 대선 출마 당시에도 “여의도식 정치를 바꾸겠다”는 일성을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이참에 여든 야든, ‘친이’든 ‘친박’이든 우리 정치의 ‘썩은 곳’을 밑바닥까지 보여주겠다는 심산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착점은 노무현 일가… 그리고 노의 승부수?
검찰수사를 둘러싼 이런 다양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분석은 결국 이번 수사의 종착점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일가(一家)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3월 초·중반까지만 해도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의 구속과 한나라당 박진 의원의 검찰소환, 그리고 친박 중진 의원들에 대한 검찰소환 통보로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여권 핵심부를 향해 내달리는 듯 했다. 이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천신일 세중나모그룹 회장과 이종찬 전 민정수석이 ‘박연차 구명 대책회의’까지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더 이상의 검찰수사 진전은 없다.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출국한 상태다.
현재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자금을 관리한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중심으로 박연차 회장, 권양숙 여사 그리고 노 전 대통령과의 ‘금전 고리’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형인 건평 씨는 물론, 아들 건호 씨 그리고 조카사위인 연철호 씨와 박연차 회장 간의 금전 관계에도 수사를 집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은 검찰수사에 대한 그간의 침묵을 깨고 7일 홈페이지를 통해 “저의 집(권양숙 여사)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했다”며 돈 받은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문을 띄웠다. “검찰 조사에도 응하겠다”고 했다.
이는 위기에 몰렸을 때 되레 치고나오는 노 대통령의 특유의 ‘승부수’라는 분석이다. 싸움을 피하지 않는 그의 오랜 ‘전투적 감각’이 이번에도 발휘됐다는 거다. 이와 관련 여권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이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의 두 번째 글 의미심장… 이상득, 건평 씨 만남 적극 부인 안 해
이를 뒷받침하듯 노 전 대통령은 전날 사과문에 이어 8일 밤 다시 직접 글을 작성해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자신감이 녹아 있다.
그는 “잘못은 잘못이다. 그러나 좀 더 지켜보자”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진실과 검찰이 의심하고 있는 프레임이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 자신만이 알고 있는 뭔가가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를 노 전 대통령의 ‘선전포고’로 간주하는 이도 있다. 그를 싸움닭으로 표현한 한 인사는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털면 나온다는 뉘앙스”라며 “비장의 카드를 쥐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과 박연차 회장 그리고 노건평 씨와의 ‘밀약설’도 주목해봐야 한다.
이 의원은 8일 “노건평 씨와의 ‘밀약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펄쩍뛰었다. 박연차 회장과는 일면식도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노건평 씨와 만남만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만날 수도 있지, 못 만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 의원과 노건평 씨가 만난 것은 그것 자체로 파급력이 강하다.
“노 부부 사법처리까지 안 갈 것”… 정계개편 신호탄일수도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의 사법처리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내놓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번 사태로 노무현 정권이 내세운 도덕성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만큼 이명박 정권은 일정부분 성공을 거둔 셈”이라며 “노 정권과 갈 데까지 간다면 현 정권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만큼 이 정도 선에서 봉합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박연차 리스트’ 수사를 청와대발(發) 정계개편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여당의 한 인사는 “YS, DJ, 노무현 할 것 없이 검찰 수사로 정치판을 흔들어 놓은 뒤에는 정계개편 시도가 있었다”면서 “여당 장악력이 떨어진 이 대통령이 이번 수사를 계기로 정계개편을 감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데일리안 = 김성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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