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전랑외교’가 또다시 육량(陸梁)한다

김규환 기자 (sara0873@dailian.co.kr)

입력 2025.11.23 07:07  수정 2025.11.23 07:16

다카이치 일본총리 ‘대만 유사시 자위대 개입 가능성’ 언급에

中 외교관, “더러운 목 베겠다”며 전랑외교 신호탄 쏘아올려

中, ‘막가파 말폭탄’, 경제적 보복조치로 전방위·무차별 맹공

日, 베이징 찾아 황급히 진화에 나섰지만 도리어 수모만 당해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지난달 31일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AP/뉴시스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중국의 ‘전랑(戰狼·늑대전사)외교’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 자위대 개입’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중국은 ‘막가파식 말폭탄’을 쏟아내는 것도 모자라 경제적 보복조치를 취하는 등 전방위·무차별적으로 일본을 난타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소속 국제뉴스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20일 ‘일본이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불장난을 하는 자는 결국 스스로 더 큰 불길에 휩싸이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사설은 이어 “대만 문제에서 중국은 어떠한 타협이나 후퇴의 여지도 없다”며 “일본 측이 끝내 잘못을 철회하지 않고 심지어 도발적 행동을 이어간다면, 중국은 더 강력한 대응 조치를 취할 충분한 이유와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정부는 앞서 19일 오전 정식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 정부에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중지한다고 공식 통보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방류되는 오염수 모니터링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국 측 설명이지만, 실제로는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관련 발언을 한 데 따른 보복 조치로 해석된다.


마오닝(毛寧)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을 통해 “다카이치 총리의 잘못된 발언이 중·일관계의 정치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훼손했다”며 “발언의 철회와 잘못을 인정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촉구했다. 이어 “일본이 다카이치 총리 발언의 철회를 거부하고 잘못된 행위를 계속한다면 중국은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중국 정부는 2023년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해양방류를 강행한 데 맞서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해 왔다. 이후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앞바다의 방사능 오염 측정에 중국 쪽 참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등을 조건으로 중국 정부와 협상 끝에 지난 5일 어렵사리 가리비 수출을 재개했으나 보름도 안돼 또다시 막힌 것이다.


중국 문화여유부(문화관광부)가 자국민에게 일본여행 자제 권고조치를 내린 가운데 지난 20일 기모노를 입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일본 도쿄 아사쿠사 지역 센소지를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AP/뉴시스

특히 이번 주초 열릴 예정이던 한·중·일 문화장관회의도 취소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문화여유부(문화관광부)는 18일 한국 문화체육관광부 측에 24일 마카오에서 열릴 예정이던 ‘2025 한·중·일 문화장관회의’를 잠정 연기한다고 통지했다. 2007년부터 해마다 한·중·일 3국이 번갈아 개최하는 이 회의는 3국 간 문화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고위급 회담 행사다.


중국 외교 당국자들은 앞서 16일 소셜미디어(SNS)에서 일본을 정조준한 폭언을 내뱉으며 외교적 압박을 이어갔다. 린젠(林劍) 외교부 대변인은 SNS 엑스에 “중국 인민의 ‘보텀라인’(Bottom Line·한계선)을 도발하려 한다면 반드시 격렬한 반격을 받아 14억 넘는 인민들이 피와 살로 쌓은 강철의 만리장성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라는 극언을 일본어로 올렸다.


‘강철의 만리장성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라는 표현은 중국에서는 외세에 맞서겠다는 결기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종종 인용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2021년 7월1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연설에서 “중화민족이 괴롭힘을 당하는 시대는 끝났다. 그 어떠한 외국 세력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압박하며 노예화하는 것을 중국 인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누가 이런 망상을 하면 14억 중국 인민들의 피와 살로 만든 강철 만리장성 앞에서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최고 지도자로서는 도저히 언급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표현을 쓴 바 있다.


전랑외교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치로 내건 시 주석이 집권한 2013년 이후 본격화했다. ‘전랑’은 만주족 출신의 액션배우 우징(吳京)이 주연을 맡아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국뽕’ 영화다. 2015년에 첫편이, 2017년에 속편이 개봉했다. 중국 특수부대 소속 우징이 미국 네이비실 출신 악당을 물리치는 게 주된 내용이다.


가나이 마사아키(왼쪽)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지난 18일 중국 베이징 외교부 청사에서 류진쑹 중국 외교부 아주사장(국장)과 회담을 마친 뒤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떠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이후 전랑은 주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것을 뜻하는 외교 용어가 됐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중국 특유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외교와는 궤를 달리한다. 시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의 경제·군사적 성장과 중화민족주의 고조를 바탕으로 등장했고 전 세계적으로 반중(反中) 정서가 극심했던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미국과의 갈등이 심해진 2023년 이후 중국 정부가 대외 이미지 관리에 나서면서 전랑외교는 한풀 꺾였다. 민감한 시기에 주변국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관측됐지만 대만 독립 인정, 주변 국가와의 영유권 분쟁 이슈가 불거지면 전랑외교가 또다시 득세하고 있다.


중국에서 전랑외교를 소환한 것은 이달 7일 대만 유사시 자위대가 무력 개입할 수도 있다는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이다. 현직 일본 총리가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분쟁에 개입해 대만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날 중의원(하원) 예산위원회에서 중국의 대만 해상봉쇄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해상봉쇄를 풀기 위해 미군이 오면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이) 무언가 무력을 행사하는 사태도 가정할 수 있다. 전함을 사용해 무력행사를 수반한다면 ‘존립위기 사태’가 될 수 있는 경우“라고 강조했다.


‘존립위기 사태’는 ‘본의 동맹국 등에 대한 무력 공격이 발생해 일본의 존립이 위협당하는 상황’ 뜻한다. 2015년 개정된 안보관련법에 따라 일본이 직접 공격 받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위대가 동맹국 등을 지원할 수 있는 ‘집단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다. 이에 분기탱천한 쉐젠(薛劍) 일본 오사카 주재 중국 총영사가 ”더러운 목을 베겠다“고 막가파식 말폭탄을 퍼부으면서 전랑외교 재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 이후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중국 정부가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재차 중단한 가운데 라이칭더 대만 총통이 일본산 수산물을 먹는 사진을 공개하며 일본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라이 총통이 지난 19일 페이스북과 엑스(X),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오늘 점심은 초밥과 미소국(일본식 된장국)을 먹었다”며 “가고시마산 방어와 홋카이도산 가리비도 포함됐다”는 글과 함께 올린 사진. ⓒ 페이스북/뉴시스

쉐 총영사는 8일 SNS 엑스에 집단자위권에 관한 하루 전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을 게재한 뒤 일본어로 ”멋대로 밀고 들어온 그 더러운 목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 각오는 돼 있는가“라고 적었다. 현직 외교관이 상대국 국가원수에게 이렇게 원색적으로 감정을 표출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분노하는 모습의 이모티콘까지 덧붙인 이 게시물은 곧 삭제됐다.


영유권을 주장하는 국가들은 그 주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해야 유리한 입지를 유지할 수 있다. 일본이 중국과 대만 간 충돌에 개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중국이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으면 자국 주장의 정당성에 의문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은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을 빌미로 외교적 충돌로 키우기로 하고 전랑외교관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 관영 언론들도 측면 지원에 나섰다. 인민일보는 17일 사설 격인 '종성'(鐘聲) 칼럼을 통해 “일본 우익세력의 지극히 잘못되고 위험한 역사관·질서관·전략관을 충분히 드러낸다”며 “군국주의를 위한 초혼(招魂)과 같다”고 주장했다. 또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 중에 핵심이며 레드라인이자 마지노선”이라며 “중국의 통일대업을 개입·저지하려는 모든 계략은 ‘당랑거철’(螳螂拒轍·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으려는 무모한 행동)이며 주제넘은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신화통신(新華通訊)도 논평을 통해 “일본 일각에서 군국주의 죄행을 반성하지 않고 무력으로 이웃 국가의 내정에 개입하겠다는 망언까지 하고 있다”며 이달 5일 중국의 3번째 항공모함 푸젠함(福建艦) 취역과 지난 9월3일 중국의 대규모 열병식 등을 거론하며 “중국 인민의 마지노선에 도전하려는 망상을 품는 자는 누구든 중국의 정면 공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은 경제적 보복 조치도 쏟아내고 있다. 중국은 일본 여행·유학 자제 권고 및 한일령(限日令·일본 콘텐츠 금지령)을 연상케 하는 일본 영화 상영 연기 등 전방위적 압박을 가했다. 일본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베이징의 주요 여행사들은 18일 일본 여행상품 판매를 아예 중단했다. 중국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이 위험하다며 일본 여행과 유학 자제를 권고한 것에 보조를 맞춘 조치다.



ⓒ 자료: 외신종합

항공사들도 올 연말까지 일본행 항공권 취소·변경에 수수료를 면제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당국이 자국민에게 일본 여행 자제를 권고한 이후 지난 15일부터 이틀 간 49만 1000여건의 항공권이 취소됐다. 이는 전체 예약의 32%에 해당한다. 일본 여행 상품 취소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홍콩 명보(明報)에 따르면 상하이의 한 여행사는 "하루 만에 예약의 60% 이상이 취소됐다"고 밝혔다.


‘한일령’도 이어지고 있다. 17일 개봉 예정이던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초화려! 작열하는 떡잎마을 댄서즈’와 ‘일하는 세포’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다. 중국에서 흥행하던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의 박스오피스는 개봉 첫날 1억 3700만 위안(약 282억 4800만원)에서 2000만 위안대로 곤두박질쳤다.


일본 정부는 황급히 진화에 나섰지만 도리어 수모만 당했다. 가나이 마사아키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18일 중국 베이징을 찾아 사태 수습을 위해 류진쑹(劉勁松) 중국 외교부 아시아사장(司長·국장)과 만났다. 그러나 회의 직후 중국 SNS를 통해 류 사장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굳은 표정으로 꾸짖고, 가나이 국장이 옆에서 고개를 숙이는 듯한 장면이 확산되며 오히려 논란은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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