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국(琉球國)은 오늘날의 오키나와로 지금은 일본의 한 지방이지만 17세기 초반까지는 류큐왕국이라고 불린 독립된 국가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중개무역을 진행했으며, 한반도와도 이런저런 교류가 있었다. 고려 때 이미 유구국에서 외교사절을 파견했으며, 우라소에성에서 계유년 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라는 글씨가 적힌 기와가 출토된 적이 있다. 계유년에 고려의 장인이 만든 기와라는 뜻으로 우라소에성이 축조된 이후 고려시대 때 계유년은 1273년과 1333년이다. 그중 1273년은 제주도에서 삼별초가 패배한 시기다. 따라서 제주도를 탈출한 삼별초 일부가 유구국으로 탈출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밖에도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조선을 떠나 세운 율도국이 바로 유구국이 있던 오키나와 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유구국은 조선 전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쳤다. 우리가 명나라에게 사대를 하는 것처럼 유구국 역시 조선을 대상으로 사대외교를 펼친 것이다.
이런 유구국에 종종 조선 사람들이 가게 되었는데 배를 타고 가다 표류를 하는 경우, 그리고 왜구들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유구국으로 팔려가는 케이스가 종종 있었다. 전자는 유구국에서 직접 혹은 중국을 거쳐서 송환시켜 주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후자였다. 머나먼 유구국에서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다가 죽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을 알게 되었는지 태종 이방원은 특별히 명령을 내려서 유구국에 노예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서기 1416년, 태종 16년 1월 27일자 실록의 기사를 살펴보자.
태종 이방원은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인간이었다. 아버지가 아끼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쳐 죽인 것을 시작으로 아버지의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며,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자신을 도운 측근들을 유배시키고 파면했으며, 스승인 장인이 살아있는데도 처남들을 불충하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장인이 죽자, 제주도로 유배보낸 처남들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남은 처남들도 유배를 보냈다가 죽여버렸다. 그 와중에 원망하는 아내도 폐출시키려고까지 했고, 세자의 장인을 지옥으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백성에게는 따뜻한 임금이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사신을 유구국으로 보내서 돌아오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의 이른 의견에 신하 한 명이 태클을 건다.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신하의 발언이 사실에 가깝다. 지금처럼 임기가 있고 투표로 지도자를 뽑는 시대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만큼은 따뜻한 군주였던 태종 이방원은 정말 엄청난 팩트 폭행을 가했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는 말과 함께 귀한 집 자식이 끌려갔으면 번거롭고 비용 드는 문제를 얘기하겠느냐고 이중으로 뼈를 때렸다. 그리고 송환의 달인이자 스페셜리스트 이예를 보낸다. 이예에 대한 실록의 첫 번째 기록은 서기 1397년인 태조 6년 1월 3일자 기사다. 왜구들이 울주에 쳐들어와서 지주사 이은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때 울주 관아의 아전이었던 이예도 같이 끌려간다. 하지만 알고 보니 붙잡힌 것이 아니라 상관인 이예를 자진해서 따라간 것이었다. 왜구들이 그 사실을 알고 감탄해서 이예 일행을 석방해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이예는 포상을 받고 외교 전문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그는 1406년에는 왜구에게 끌려갔던 70명의 조선인들을 송환시켰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 태종 이방원에게 유구국으로 가서 끌려간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이예는 먼 바다를 건너서 유구국으로 가서 그곳에 있던 44명의 조선인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태종 이방원의 의지와 이예의 실력이 지금도 가깝다고 할 수 없는 머나먼 오키나와에 끌려간 백성들을 데리고 올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후에도 일본과 대마도를 드나들면서 끌려간 백성들이 돌아오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고, 조선과 일본의 외교에도 힘을 보탰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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