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남 연쇄 살인마 [정명섭의 실록 읽기⑬]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6.24 14:09  수정 2025.06.24 14:09

처남은 나와 결혼한 아내의 남자 형제를 뜻한다. 처가 집에서 장인 장모 다음으로 불편하고 조심해야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처남을 한둘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죽인 간 큰 남자가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이방원, 조선의 세 번째 임금이며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인터넷에서는 처남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을 죽였다고 해서 킬방원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것도 그냥 처남이 아니라 이방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주었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혼인 당시 이방원의 전주 이씨 집안은 아내의 집안인 여흥 민씨 집안과 수준 차이가 꽤 난 편이었다. 여흥 민씨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였으며 머나먼 동북면에서 온 촌뜨기 집안의 다섯 번째 아들을 사위로 맞이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민제는 이방원의 똑똑함과 야심,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성계의 뛰어난 활약상을 잘 알고 있었다.


제주도의 바닷가 (출처 : 직접 촬영)


당시 집안을 이끌던 민제는 성균관에서 공부를 가르쳤는데 이방원은 그의 제자였다. 이방원을 눈여겨 본 민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두 번째 딸과 혼인을 맺도록 했다. 두 살 연상의 아내를 맞이한 이방원은 과거에 합격할 때까지 처갓집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자식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네 명의 남자 형제들이 있었는데 첫째 민무구와 둘째 민무질이 매형인 이방원의 측근으로 맹 활약을 했다. 이방원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시하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할 때 가담했고, 한성과 개경에서 벌어진 두 차례 왕자의 난에서도 앞장서서 활약을 했다.


민무구와 민무질 입장에서는 자신의 매형인 이방원을 돕는 것이 자신들의 집안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거기다 이방원의 큰아들 양녕대군이 다음번 왕위에 오르면 외척으로서 큰 권력을 쥐게 되는 상황이었다. 민씨 형제들은 이제 자신들의 앞날은 탄탄대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불편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들의 처남 이방원이었다. 그는 어렵게 쟁취한 권력을 자식들에게 대대로 문제없이 이어주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사병을 혁파하고 반대하는 공신들을 귀양보내거나 파면하는 것으로 정리한다. 그리고 그다음 순서는 지나치게 강력해진 외척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태종 7년인 서기 1407년 7월 10일, 영의정이자 종친인 이화가 상소문을 올린다.


개국정사 좌명공신 영의정부사 이화 등이 상소하여, 민무구와 민무질, 신극례 등의 죄를 청하였다.


민무구와 민무질의 죄는 일단 지난해 이방원이 아들인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가 번복했을 때 다들 안도했지만 두 사람만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무구는 이방원에게 세자 이외의 아들들은 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러차례 얘기했다. 물론, 단순하게 해석하지만 세자의 동생들이 똑똑하면 나중에 후계문제를 두고 말썽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들은 태종이나 상소문을 올린 이화는 세자를 제외한 다른 대군들을 없애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동생인 민무질의 경우에는 조정 대신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임금이 자신들을 홀대한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이 발각되었다. 사실 태종 이방원의 진짜 타깃은 아마도 장인인 민제였을 것이다. 민제는 이방원이 세자시절 진행한 사병 혁파를 비롯한 각종 개혁 정책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불만을 드러냈다. 민제의 집안 역시 기득권인 문벌 귀족집안이라 사병을 혁파하고 토지를 분배하는 이방원의 정책에 상당히 불만을 가졌고,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사극에서는 온화하고 자식들에게 자중하라는 말을 하는 착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사실 이 사람도 격랑의 여말선초를 살아간 노회한 정치인이다. 고마울 때는 아버지 같은 장인어른이자 든든한 처남이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쌓아가는 입장이 되자 걸림돌 신세가 되었다. 다만, 민제는 장인이라는 특별한 신분 덕분에 직접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남들은 얘기가 달랐다. 장인은 곧 죽을 사람이었지만 처남들은 아직 팔팔했기 때문이다. 처남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받은 이방원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진심은 달랐다. 임금의 마음을 짐작한 신하들이 처벌하라는 상소문을 연거푸 올리는 와중에 장인이자 그들의 아버지인 민제가 사위이자 임금인 이방원에게 제발 용서해달라고 읍소한다.


이때는 다시 사위로 돌아왔는지 두 사람을 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하지만 여전히 처벌하라는 상소문이 올려왔고, 이즈음, 장인인 민제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 이방원은 기다렸다는 듯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계속 처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못 이기는 척하고 명령을 내린다.


순금사 호군 이승직, 형조 정랑 김자서를 보내어 제주에 가서 민무구, 민무질에게 자진해 죽게 하였다.


서기 1410년인 태종 10년 4월 17일 태종실록에 나온 기사이다. 이것으로 몇 년 동안 유예되었던 두 처남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을 맞이한다. 비극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6년 후인 서기 1416년, 두 사람의 동생인 민무휼과 민무회가 왕의 판결에 불만을 토로했다는 이유로 역시 형들처럼 유배를 갔고, 거듭되는 신하들의 처벌 요청에 이방원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거든 막지 말라는 요상한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얼마 후,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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