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어느 시점에서는 무대 위로 올라가 그 답답함을 안긴 배우들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까지 일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그것을 강요하는 모습. 이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모습. ‘답답함’이 밀려오는 것은 비단 무대 위 장면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2019년 초연된 연극 ‘시련’이 6년 만에 재연 무대를 올렸다. 2019년에도 무대에 한국 사회가 투영되어 한숨 쉬게 했지만, 2025년에는 그 한숨에 무거운 ‘답답함’까지 얹혀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시련’은 마을 소녀들이 늦은 밤 조용한 숲에 모여 몰래 춤을 춘 것이 들키자, 이것이 ‘악마’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물론 본인들의 의사가 아니다. 어느 순간 어른들이 그녀들에게 ‘악마를 봤다’고 강요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숨기고자 어른들의 원하는 대로 말하고 움직인다. 그리고 어른들은 이들을 이용해 정적을 처단하고, 땅을 빼앗는다. 여기에 오로지 자신의 결정만이 ‘맞다’고 생각하는 판사까지 가세하면서 마을은 혼란에 빠진다. 악마와 계약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사형되고 수감된다.
광기가 마을을 덮쳤지만 이를 막는 이는 없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을 부정하고 악마를 옹호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법정을 모독한 죄로 감옥에 끌려간다. 마을은 ‘거짓을 말하면 비겁하게 살고, 진실을 말하면 죽는 공간’이 된다. 거짓을 말하는 소녀들과 이를 이용하는 어른들, 그리고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 믿는 판사의 결합이 만들어 낸 공간이다.
연극은 이 상황이 왜 벌어지는 지에 대한 설명을 1막에서 보여준다. 많은 대사가 쏟아지고 여러 의문을 품을만한 내용들이 쏟아지긴 하지만, 아직은 ‘미풍’이다. 법정 장면이 등장하는 2막은 ‘태풍’이다. 쉼 없이 몰아치고, 거짓말이 난무한다. 진실을 외치는 쪽에서도 거짓을 말하는 쪽에서도 연신 ‘하나님’을 외쳐대는 소리가 가득하다. ‘답답함’이 가슴을 짖누른다.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극의 절정은 존 프락터와 불륜 관계인 애비게일이, 아내와 가정으로 돌아간 존 프락터를 빼앗기 위해 거짓 증언의 모습과, 진실을 말했지만 ‘악마’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몰리는 메어리의 심경 변화의 모습 그리고 메어리를 몰아붙이는 애비게일과 소녀들의 법정 연기로 만들어진다. 여기서부턴 진실이든 거짓이든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연극 ‘시련’은 ‘세일즈맨의 죽음’ 등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의 대표작 중 하나다. 1692년 세일럼 마녀재판을 배경으로 집단 히스테리와 정치적 억압 등의 문제를 언급하며 1950년대 당시 미국에서 벌어진 매카시즘을 비판했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시골 마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지만, 1950년대의 사회를 비판한 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2025년 한국 사회를 향하기도 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자신과 함께 가지 않으면 상대를 ‘악마화’하는 한국 사회는 1950년대에 휩싸인 미국 매카시즘을 닮아간다. ‘시련’ 속 소녀들은 연기를 하며 특정 인물을 지목했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인터넷에서 좌표를 찍어 지목하면 극단적 무리가 몰려가 ‘사회적 매장’을 시키려 한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한국 사회에, 한국 정치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소환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이용한 특정인들의 이득일 뿐, 하나님을 통해 진실을 찾으려는 의도도 의지도 없다. ‘시련’에서 목사가 하나님을 이용해 정적을 죽으려 하고, 판사가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잘못된 판결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재연에는 존 프락터 역에 엄기준, 강필석이 더블 캐스팅됐고, 목사 사무엘 페리스 역엔 박은석, 판사 댄포스 역엔 남명렬이 캐스팅됐다. 작품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김수로는 권해성과 함께 마을 유지 토마스 푸트넘 역을 맡았다. 애비게일 윌리엄즈 역에는 류인아가, 프락터 집안의 하녀이자 애비게일의 친구인 메어리 워렌 역은 진지희가 맡았다.
모두가 안정적인 연기를 하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애비게일의 류인아와 메어리 역의 진지희 그리고 댄포스 역의 남명렬이다. 류인아는 소녀들의 거짓말을 어른들이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을 흡인력 있게 연기했고, ‘갈매기’ 이후 세 번째 무대에 서는 진지희는 이제 ‘무대 위 배우’로서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2막부터 등장하는 남명렬 배우는 발성과 대사 전달력으로 등장하자마자 무대를 장악한다.
연극 ‘시련’은 27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일주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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