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나라, 박정희>대구사범시절 금강산 수학여행 글 남겨
아름다운 풍광 이면에 담긴 헐벗은 조국에 대한 책임 표현
1934년 5월 금강산 수학여행 기념 책자에 실린 대구사범학교생 박정희의 글.
한상억과 최영섭은 강화 출신이다. 강화 사람들은 예전부터 인천으로 나와 학교를 다니고 인천에 정착해서 많이들 활동을 해왔다.
강화는 북한에서 남하하는 사람들의 경유지이기도 해서 해방과 6.25 기간에 평안도, 황해도 피란민들이 강화를 거쳐 인천으로 와서 타관객지의 삶을 개척했다. 필자의 고향 인천은 팔도 사람들이 다 모인 곳이다. 본토박이보다 이주민이 월등히 많다.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필자의 동네에 사는 실향민(황해도 연백 출신) 내외는 안내원이 자꾸 “남쪽엔 공해가 심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해 주는 바람에 “꺼먼 먼지 마시고 그냥저냥 산다”고 대답했다 한다.
맑고 고운 금강산에 가보니 공기의 맛은 정말 좋은데 입맛이 변해선지 냉면은 맛있는 줄 모르겠더라고 했다.
그리운 금강산에 간 실향민 내외에게 그리운 곳은 따로 있었다. 두고 온 고향이다. 그곳 주민들을 만나면 고향 소식이라도 전해 들을 수 있겠지만 아예 가당치도 않은 그런 기대는 접어야 했다.
맑고 고운 것은 금강산뿐, 거기서 바라보이는 장전항 뒷산을 비롯해서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산들이 모두 헐벗었는데, 밤이면 춥고 배고픈 사람들의 칠흙같은 어둠 앞에 팔자좋은 금강산 유람이라니! 그 내외는 괜히 미안하고 사람 할 짓이 못되더라며 이후 금강산 발길을 끊었다.
그리운 금강산을 찾아갔지만 금강산의 말없는 표정을 바라보노라니 정말 반기는 것 같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수난의 세월 동안 바위처럼 뭉쳐진 한(恨), 주름진 아픔과 슬픔 앞에 미안하고 부끄러웠던지…….
노래 ‘그리운 금강산’은 5.16이 나던 해인 1961년에 발표되어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 분위기를 타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1973년 2월 대통령 박정희는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근대미술60년전’의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온정리 풍경’이라는 금강산 그림 한점을 보고는 화가를 청와대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정리 풍경’을 그린 화가 이대원은 대통령이 언제 어떻게 그리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들을 묻는 말에 젊은 시절(1941년) 금강산에 갔다가 눈이 많이 내려 산에 오르지 못하고 여관에서 그림을 그린 이야기를 했다.
‘온정리 풍경’은 한참 떨어진 금강산을 원근의 구도를 깨고 온정리 앞으로 끌어당겨 한폭에 담은 작품이었다.
“여기가 북쪽 온정리입니까?”
박정희는 외금강 관광의 중심지인 온정리의 풍경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온정리는 박정희의 젊음이 스쳐간 곳이기도 하다.
그는 대구사범학교 3학년 때인 1936년 5월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때 동기생 하나가 수학여행 기념으로 친구들의 글을 모으고 기념품 가게의 스탬프를 찍어 책자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박정희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너는 세계에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삼엄함으로 천하에 일홈을 떨치는데
다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가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희 씀
수학여행의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삶의 고난이 금강산의 수려한 풍광과 대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라는 끝부분에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지만, 식민지 젊은이의 비감어린 심사와 잃어버린 꿈을 되찾으려는 갈망을 헤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즐거움에도 아픔이 함께 있고, 기쁨에도 슬픔이 어우러지는 것이 우리네 삶의 정서일 것이다.
노래도 구성진 가락에 흥겨움이 실려 있다.
1972년 4월14일 통일로에 세워진 신의주, 평양, 개성 방향 이정표.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봉 팔만 구암자 유점사……”로 시작되는 ‘강원도 아리랑’을 부른 가수 하춘화는 외국 귀빈이 오면 청와대 영빈관에서 공연을 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내 노래 중 유독 ‘강원도 아리랑’을 좋아했는데, 이 노래를 부를 때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가사를 적어달라고 할 만큼 재미있어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시대의 금강산은 남북의 긴장 상황 너머로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박정희는 국력을 기르는 것만이 전쟁을 막고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믿고 경제건설에 매진했다.
박정희 시대가 키운 기업인 정주영이 1998년 소떼를 몰고 방북을 해서 시작된 금강산관광도 따지고 보면 남쪽에서 북으로 가는 경제력의 흐름인 것이다.
그런데 금강산 관광은 단지 돈이 흘러가는 것일 뿐, 제한된 구역에서 먹고 자고 구경하되 어디를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주민 접촉이 금지되어 있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와 즐거움의 구경이어야 하는데 세상에 둘도 없는 희한한 관광이다.
그런 관광에서 기어이 큰 사고가 나고 말았다. 50대의 여성 관광객이 해변을 산책하다가 통제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이다.
무고한 국민이 죽었는데도 당국은 조사도 못하고 대화의 통로조차 꽉 막혀 있다. 이것이 남북관계의 현실이다.
금강산 관광도 사업이긴 하지만 남북의 정치가 개입된 특별한 인간 교류이다. 문제는 언제라도 북쪽이 마음대로 뒤집을 수가 있고, 예측 불가능한 사태가 도사려 있다는 것이다.
기본 설정이 잘못되어 있는 금강산 관광 사고의 책임은 당연히 정치 쪽에 있다. 6.25때의 국군포로, 납북 어부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어 해결책을 못찾고 헤매면서 금강산 관광이라니! 돌아오지 못하는 국민을 두고, 뼈에 사무친 아픔을 외면한 채 관광이라니!
금강산 관광뿐 아니라 모든 남북교류는 인간의 기본 삶에 진지하게 접근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 교류에 대한 신뢰가 없다. 잃어버린 사람들 찾아주고 헤어진 사람들 만나는 게 우선이다. 그 사랑과 아름다움의 금강산 풍광이 무색하게, 관광은 무슨 얼어죽을 관광인가.
지난날의 젊은 박정희는 헐벗은 삶이 부끄러워 금강산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다고 했는데, 수십년 세월이 지난 오늘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흉악한 짓을 멋대로 저지르니 더욱 기막히고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수 없다.
금강산아, 머리를 들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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