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만드는 방식마저 옛 것일 필요는 없다. 과거의 역사라 할지라도 그 시대와 인물을 해석하는 방식은 현 세대의 시선과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극은 그저 옛날이야기를 넘어,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발굴해내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사극 장르의 형식과 트렌드와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바뀌어왔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극의 진화 속도는 예전부터 훨씬 빠르고 획기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장르와 소재를 다루는 사극의 전통적인 방식에 반기를 드는 ‘퓨전 사극’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종전의 국내 사극은 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왕실의 궁중 비사와 권력투쟁에 초점을 맞춘 ‘정치 사극’이 주류를 이뤘다. 전통 민담에 공포와 풍자 형식을 곁들인 <전설의 고향>류나, 무협, 전문직 드라마 같은 새로운 장르와의 결합 시도가 이전에 없던 것은 아니지만 주류로서 자리 잡지는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 사극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한 작품으로 바로 <허준>과 <태조 왕건>.
<허준>은 ‘동의보감’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의 대표적 명의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왕조 중심의 전통사극에서 벗어나 한의학이라는 이색 소재와 전문직 장인의 성공드라마라는 색다른 형식을 통해 안방극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 작품의 성공을 바탕으로 이후 <상도>, <태양인 이제마>, <대장금> 등 전통적인 사극의 공식에서 벗어나 상상력과 현대상이 반영된 퓨전사극들이 대거 등장했다.
<태조 왕건>은 안방극장에서 전쟁사극 열풍을 일으키며 대하사극의 ‘탈조선’화 흐름을 이끄는 계기가 됐다. 한민족 최초의 자주적인 통일을 이끌었던 고려 시조 왕건의 일대기를 다룬 <태조 왕건>은 당쟁과 궁중 스캔들로 점철된 조선시대를 벗어나 사극의 시대범위를 고대로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태조 왕건>을 통해 선보인 대규모 전투 신과 스펙터클한 화면은 이후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주몽> 등을 통해 사극의 주요한 흥행 공식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시대극이 옛날이야기를 넘어 영화 못지않은 ‘안방극장의 블록버스터’로 자리 잡는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이후 사극의 진화 속도는 점점 빨라져 <다모>, <대장금>, <해신>, <신돈>, <주몽>, <태왕사신기>, <별순검>,<왕과 나> 등에 이르기까지, 현대적이거나 ‘사극 같지 않은 사극’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다모(다모), 내시(왕과 나), 상인(상도), 궁녀(대장금), 기생(황진이) 등 조선 시대 전문 직업인들을 유교적 신분제에 묶여있던 조선시대를 새롭게 조명하는 이야기가 대거 선을 보였다. 특히 <대장금>은 그동안 ´내수용´으로 국한되어있던 사극의 ´한류열풍´을 주도하며, 음식,궁중문화,의학 등 한국적인 소재의 세계화에 대한 가능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또한 전통적인 역사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궁예와 견훤(태조 왕건), 광종(제국의 아침), 고려 무신정권(무인시대), 장보고(해신), 신돈과 공민왕(신돈), 폐비윤씨(왕과 나), 정조(한성별곡, 이산) 등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저평가 받았던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복원하려는 이야기도 늘어났다.
오늘날 사극의 시대범위는 더욱 확장되어 통일신라시대(해신), 삼국시대(연개소문, 태왕사신기)를 거쳐 역사적 사료가 거의 없는 고조선(주몽)이나 발해 시대(대조영)에까지 이르고 있다. 판타지에서 전쟁, 멜로, 전문직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간의 융합이 가속화되었는가 하면 인물을 다루는 방식도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보다 현대적이고 치밀해졌다.
전쟁씬에서는 각종 CG과 대규모 엑스트라 등을 동원해 장대한 비주얼이 강조됐고, 역사적 사실이나 고증에 얽매이지 않고 작가와 제작진의 창조적인 상상력과 역사적 재해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2008년의 사극은 여전히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아 진화중이다. 지난 한 해 동안 ‘고구려 연대기’로 대표되는 전쟁 사극 열풍이 막을 내리고, 다시 조선시대로 귀환했다.
<대왕 세종>, <이산>, <왕과나> 등의 작품에서는 기존의 당쟁 위주의 정치사극과 차별화해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이면을 탐구하며 역대 제왕의 리더십과 시대정신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이 돋보인다. 퓨전사극을 표방한 <쾌도 홍길동>은 파마머리와 선글라스를 하고 현대적인 대사를 내뱉는 홍길동을 내세워 눈길을 끌고 있다.
한편으로 사극의 트렌드가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일각에서는 지나친 상업화와 자의적인 역사왜곡이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 열악한 제작환경과 대작 연출의 노하우 부족으로 인하여 ‘용두사미’ 혹은 함량미달의 작품이 쏟아지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진화를 거듭하는 것은 물론, 좀 더 책임감 있는 역사인식과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균형 감각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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