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성공과 국내 위기의 역설…'포스트 오징어 게임' 시대, K콘텐츠의 생존 방정식
K콘텐츠를 둘러싼 시장 지표들은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의 위상과 국내 제작 생태계의 부실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글로벌 미디어 시장조사업체 옴디아(Omdia)에 따르면 2025년 4월부터 2026년 3월 기준 한국 콘텐츠의 넷플릭스 글로벌 누적 시청 시간은 121억 시간으로 미국(596억 시간)에 이어 전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이는 비영어권 콘텐츠 국가 중에서는 독보적인 1위의 수치로, 경쟁국인 일본(84억 시간)보다 44% 많고 콘텐츠 강국인 영국의 거의 두 배 수준이다. 옴디아의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수장 마리아 루아 아게테가 "한국은 미국 외 지역에서 글로벌 성공 콘텐츠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듯, K콘텐츠는 명실상부 비영어권 콘텐츠의 부상을 이끈 선구자로서 글로벌 플랫폼의 핵심 파트너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전성기의 이면에는 넷플릭스 등 글로벌 자본에 대한 과도한 종속과 국내 제작 체력의 급격한 저하라는 심각한 구조적 딜레마가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플랫폼들이 치솟는 제작비 부담을 이유로 위험성이 높은 신작 오리지널 드라마 제작을 줄이고 예능이나 이미 완성된 독점 방영권(라이선스) 구매 방식으로 전략을 전환하면서, 국내 제작 시장은 급격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실제로 국내 드라마 제작 편수는 2022년 141편에서 2024년 80편, 2025년 85편으로 3년 만에 절반 가까이 쪼그라들었다. 2026년 104편 방송 예정으로 회복세를 전망하고 있지만, 이는 여전히 2022년 정점 대비 26% 낮은 수준이다
'도깨비' ·'킹덤' ·'오징어게임' 포스터ⓒtvN· 넷플릭스
국내 제작사들이 적자에 허덕이며 위기에 직면한 주요인은 제작비의 천문학적인 급증이다.
넷플릭스가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2016년 당시, tvN 드라마 '도깨비'는 회당 9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하며 평균 3억 원이던 국내 시장 기준을 깨고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그러나 3년 뒤 넷플릭스의 첫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인 '킹덤'은 회당 30억 원을 기록하며 '도깨비'의 세 배를 뛰어넘었고, 최근에는 회당 제작비가 37억 원 선(총제작비 600억 원)인 '폭싹 속았수다'를 비롯해 '오징어 게임' 시리즈의 회당 제작비가 70억 원에서 90억 원대까지 치솟는 등 제작비 인플레이션이 한계치에 달했다. 넷플릭스는 한국 드라마 제작비가 미국에 비해 현저히 저렴하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상승을 용인해 왔다. 실제로 2022년 한국 드라마 '수리남'의 총제작비는 350억 원(회당 58억 원) 수준이었으나, 같은 해 미국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시즌4'는 총제작비 3555억 원(회당 395억 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제작비의 100%를 대주는 대신 약 20% 안팎의 안정적인 마진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한국 영상 생태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배우들의 출연료 폭등을 불러오는 부작용을 낳았다.
배우들의 눈높이가 넷플릭스 기준으로 상향되면서, 일반 국내 방영작 역시 비슷한 수준의 출연료를 지급해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됐다. 여기에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16부작 기준 촬영 일수가 기존 100~110일에서 160~180일로 늘어난 점도 비용 상승을 가속화 했다. 결국 기초 체력이 고갈된 국내 제작사들은 완성작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글로벌 플랫폼에 진출하려 해도 초기 제작을 밀고 나갈 체급 자체가 부족한 상황에 처하게 됐고, 글로벌 타깃 대작은 오직 넷플릭스나 디즈니+ 같은 글로벌 플랫폼 자본만이 내놓을 수 있는 독점적 구조로 변해버렸다.
뉴시스 ⓒ홍정도 중앙홀딩스 부회장이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빌딩에서 중앙그룹 계열사 기업회생절차 신청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하고 있다
이러한 제작 환경의 악화는 결국 국내 대형 미디어 그룹의 재무 구조 악화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난 6월 중앙홀딩스를 비롯해 콘텐트리중앙, 메가박스중앙 등 중앙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사건 역시 이러한 구조적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7000억원 규모에 달하는 올림픽·월드컵 중계권 확보 과정에서 발생한 차입금 부담과 유동성 악화가 지목된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단순한 일회성 자금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방송 광고 시장 침체와 드라마 제작 수익성 악화, 콘텐츠 사업 전반의 성장 둔화가 장기간 누적된 상태에서 대규모 차입 부담이 겹치며 위기가 표면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개국 15년 만에 발생한 이번 사태는 콘텐츠 호황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국내 미디어 산업의 체질적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은 넷플릭스가 독점적 지위를 쥔 상태에서 한국보다 제작비가 저렴한 다른 아시아 국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넷플릭스는 2025년 인도 시장에 17억 달러(약 2조 4000억 원)를 투자했고, 태국과 필리핀에 대한 투자액도 늘리는 등 대체재 발굴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한국 콘텐츠가 개척해 놓은 비영어권 스트리밍 시장에서 스페인어권이 신규 제작 비중을 늘리고, 강력한 IP를 앞세운 일본과 압도적 내수 규모를 자랑하는 인도가 급부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내 업계 내부에서 K콘텐츠의 흥행 타율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글로벌 자본이 언제든 한국 투자를 철회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이유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 콘텐츠 산업이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자생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플랫폼의 하청 구조를 탈피하는 실질적인 대안과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핵심은 플랫폼 종속에서 벗어난 IP(지식재산권) 소유권 확보와 배급망 다변화다. 이를 위해 제작사가 초기 기획 단계에서 플랫폼과 IP를 공유하거나 방영권만 분할 판매하는 모델을 정착시켜야 한다. 또한 티빙이 글로벌 플랫폼인 HBO Max에 전용 브랜드 관을 개설해 아시아태평양 17개국에 콘텐츠를 직접 공급하는 사례처럼 배급 창구를 넓히고, 일본이나 태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공동 제작을 통해 비용을 효율화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도 대안 중 하나다.
무엇보다 과열된 제작비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려는 산업 내부의 자정 노력이 필수적이다. 글로벌 플랫폼이 배우 출연료 상한선을 조정하며 제동을 걸기 시작한 흐름에 맞추어, 국내 업계 전반이 합리적인 제작비 가이드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무리한 대작 위주의 편성에서 벗어나 제작 효율성을 높여야만 국내 자본이 감당할 수 있는 작품이 늘어나고, 제작사들이 초기 실탄을 확보해 다시 경쟁에 뛰어들 여력이 생긴다.
이에 발맞추어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도 구체화되고 있다. 정부는 모태펀드 등 2026년 콘텐츠 및 영화 분야 정책펀드로 총 818억 원의 재원을 조성하여 중소 제작사의 초기 기획과 제작을 위한 직접 투자 실탄을 공급하기로 했다.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고도 작품을 완수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한편, 콘텐츠진흥원의 해외 거점을 30개소로 전격 확대하여 국내 제작사들이 글로벌 플랫폼을 통하지 않고도 해외 현지 바이어에게 직접 라이선스를 직수출할 수 있는 판로 개척을 전방위로 지원하고 있다.
한 제작사 PD는 "K콘텐츠가 처음 세계를 사로잡았던 원동력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맞춤형 기획이 아니라, 한국 관객의 정서에 깊이 공명했던 독창적인 서사와 장르 다양성에 있었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요구하는 특정 장르에만 자본과 기획이 쏠리는 현상을 막고, 창작자들이 자유롭게 새로운 형식과 언어를 실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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