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 “시민들이 주인공”…‘란 12.3’에 담은 빛의 혁명 [D: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4.26 08:21  수정 2026.04.26 08:21

22일 개봉,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기습적인 계엄 선포로 흔들렸던 그날 밤, 누군가는 국회로 향했고 누군가는 숨죽여 화면을 지켜봤다. 이명세 감독의 신작 '란 12.3'은 그 혼돈의 현장을 지켰던 283명의 시민의 제보 영상과 보좌관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완성된 현장의 기록이다. 정치적 선동이나 가벼운 풍자 대신 '시네마틱'한 완성도에 집중한 이 감독은,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을 간직한 실제 기록들부터 현대 시민들의 '빛의 혁명'까지를 하나로 엮어내며 우리 시대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저항의 역사를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인다.



이처럼 뜨거운 역사의 기록을 스크린으로 옮기면서도, 그는 단순한 기록자 이상의 자의식을 잃지 않았다. 세간의 시선이 사건의 전말에 쏠려 있을 때, 그는 오히려 영화라는 매체가 이 엄혹한 현실을 어떻게 영화답게 담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외국 평론가들이 제 영화를 두고 '이명세는 이명세 영화를 만든다'고 쓸 때가 있는데, 그게 지금까지 들은 평가 중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기분 좋은 칭찬이에요. 저는 영화를 만들기 전에 항상 스스로 자문자답하는 게 있어요. '새롭지 않다면 왜 하지? 다르지 않다면 왜 하지?' 흔히 말하는 'Something New', 내가 이 영화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뭔지 항상 고민하죠. 후배들한테도 그래요. '남들 다 한 거 왜 하니'라고요."


이번 프로젝트에는 김어준이 기획 프로듀서로 참여한 만큼, 제작 배경 역시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이에 대해 이명세 감독은 특정 인물의 참여에 대해 영화의 본질과 제작의 현실을 들어 설명했다.


"제작은 프로덕션에서 했고, 김어준 씨는 정확히 말하면 '키 프로듀서'예요. 사실 그게 누구냐는 중요한 것 같지 않고요. 제 사비가 넉넉했다면 스스로 했겠지만 그럴 순 없는 거니까요. 그분이 제작의 발판을 만들어줬고 펀드가 조성돼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거죠. 제 욕심은 이 영화를 정말 많은 사람이 보는 거예요. 특히 미국 사람들이 많이 봐줬으면 좋겠어요. "


왜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했는지, 그 본질적인 시작에 대해 묻자 이 감독은 그날 밤 자신이 목격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잊고 있던 시대의 아픔을 소환하는 신호탄이었다.


"영화를 감독한다는 건, 일단 확실한 이미지 하나가 잡혀야 시작돼요. 저한테는 뉴스공장에 군인이 나타난 그 장면이 첫 이미지였어요. 그게 그냥 직감적으로 너무 공포스러웠어요. '만약 누군가 이 영화를 만든다면 저 장면 하나만으로도 예고편이 되겠다' 싶었죠. 그 불안과 공포가 제 기억 속의 문장들을 소환하더라고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첫 문장인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라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것들이죠.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는데, 그래서 내 자신이 미워졌다는 그 정서들이 시대별로 소환되는 느낌이었어요."


엄혹한 시대를 관통하며 느꼈던 무력감은 오히려 가장 이명세다운 실험적인 연출로 이어졌다. 나레이션과 인터뷰를 과감히 생략하는 대신 자막의 크기와 움직임, 음악의 리듬만으로 대사를 대신하는 파격적인 '펑키 누아르'의 세계를 구축했다.


"영화를 찍을 때 연대기적인 얘기보다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의 감정만을 찍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엄혹한 시기를 살아왔기에 '과연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괴감을 느낀 적이 있었죠. 니체의 말처럼 '당신이 내게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더는 당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그 분노가 있었어요. 이번 '란 12.3'은 이전 작업인 '더 킬러스'의 무성 영화적 기법과 바이브의 연장선에 있어요. 이미지로 사유하는 무성 영화가 영화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첫 이미지가 군인의 모습이었다면, 영화의 전체 톤은 펑키 누아르(Funky Noir)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레이션이나 뻔한 인터뷰 없는 다큐를 하겠다는 숙제를 스스로 던진 거죠. 자막도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이미지예요. 읽을 때 느껴지는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서, 감정에 따라 글씨가 커지거나 작아지고 움직이게 디자인했어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조성우 음악 감독한테 '음악이 대사다'라고 주문했죠."


작품의 문을 여는 오프닝은 몇 달간의 치열한 고민 끝에 광주라는 상징적 장소와 맞물려 완성됐다. 90년의 역사를 간직한 광주극장의 고전적인 공간감 위에 실험적인 설정을 더해, 관객을 현실과 영화가 교차하는 세계로 안내했다.


"오프닝을 만들려고 몇 달을 고민했는데, 결국 다큐멘터리라는 본질을 벗어나지 않기로 했어요. 마침 한강 작가의 노벨상 소식도 있었고, 광주 망월동에 가서 고사라도 지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광주극장은 민족 자본으로 지어진 90년 된 역사적인 곳이에요. 요즘은 보기 힘든, 막이 열리고 닫히는 그 극장의 공간감이 너무 좋거든요. 불이 꺼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그 느낌을 영화의 시작으로 가져왔어요. 엉터리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듯한 설정도 그 '트와일라잇 존' 같은 느낌을 심플하게 전달하기 위한 거였죠."


최첨단 AI 기술이 이미지를 손쉽게 만들어내는 시대지만, 감독은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담은 실제 기록들을 고집했다.


"광주 장면은 AI를 쓰지 않았어요. 그 장면들은 실제 광주의 기록들이고, 거기에 '고 유영길 촬영감독님을 기억하며'라는 마음이 담겨 있어요. 그 많은 군인 장면들도 다 유영길 촬영감독이 찍은 것들이에요. 제가 조감독 시절부터 같이 했던 분인데, 현장에서 가끔 눈가를 긁는 습관이 있었어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말을 안 하셨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건, 80년 광주 때 방독면을 쓰고 다니면서 최루가스를 많이 맞아서 생긴 후유증 때문이었어요. 그 시절에는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말을 못 했던 거죠. 어떻게든 그분이 찍었던 그 장면들, 그 시선들을 이 영화 안에 담고 싶었어요. 그게 제 나름의 작은 마음이자 애정이었고요."


영화에 쓰인 자료 대부분은 283명의 시민이 보내온 실제 영상들이다. 감독은 여기에 보좌관들의 생생한 증언과 긴박한 재연 장면을 더해, 다큐멘터리 특유의 사실감과 영화적 몰입도를 동시에 확보했다.


"제보 영상은 정말 자발적으로 많이 보내주셔서 어렵지 않았어요. 국회 보좌관들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장면 같은 건, 사실 안 찍으려고 하다가 긴장감을 위해 따로 찍었어요. 하지만 그 사연과 목소리는 실제 원은솔 보좌관의 것이에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고 손톱이 깨진 사연들을 하나로 모아 녹여낸 거죠. 일상의 공간이 느닷없이 깨지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실제 같은 그림과 애니메이션을 팝아트적으로 섞었습니다."


이 감독은 정치적인 논란이나 특정 인물에 대한 가벼운 풍자보다는 영화로서의 완성도와 그날의 생생한 감각을 전달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기록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관객의 심장을 울리는 시네마틱한 체험을 선사하기 위해, 소리 하나 화면의 각도 하나에도 엄격한 연출 원칙을 적용했다.


"정치적으로 치우치거나 희화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저는 정치 고관여층이 아니라 상식적인 영화감독일 뿐이니까요. 네 가지 원칙, 시네마틱(Cinematic), 이모셔널(Emotional), 드라마틱(Dramatic), 유머(Humor)를 세웠어요. 세로 화면의 제보 영상들을 어떻게 시네마틱하게 보여줄지, 사운드를 어떻게 나이트클럽 우퍼처럼 가슴 울리게 만들지도 고민했죠. 헬기 소리가 귀를 찢을 듯 들려도 좋다고 했어요. 그 현장의 공포를 그대로 담고 싶었으니까요."


과거의 투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노래하고 춤추며 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감독은 '빛의 혁명'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비폭력과 즐거움으로 무장한 이 특별한 민주주의의 현장이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가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이 엄숙하기만 한 게 아니라, 형광봉을 흔들며 자기들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이 묘했어요. '즐기는 놈은 못 이긴다'는 말처럼, 이들은 절대 지치지 않겠구나 싶었죠. 비폭력 불복종으로 이뤄낸 이 대한민국의 빛의 혁명을 전 세계가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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