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박해수·이영애·김유정·황정민 등 잇따른 무대 복귀
드라마 제작 감소 등 환경적 별화...연극 무대 매력적 대안으로
전도연과 박해수의 ‘벚꽃동산’, 이영애의 ‘헤다 가블러’, 김유정에 이어 김향기가 바통을 이어받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 황정민의 ‘맥베스’, 조승우의 ‘햄릿’ 등 대극장 연극 무대가 연이어 스타 캐스팅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화제성을 넘어, 한국 연극계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거대한 흐름이다. 한때 영화와 드라마에만 머물던 최정상급 배우들이 연극 무대로 대거 이동하면서, 연극은 전례 없는 상업적 성공과 대중적 관심을 누리고 있다.
32년 만에 '헤다 가블러'로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물론 스크린 스타의 연극행이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00년대 후반, 연극열전을 필두로 스타마케팅은 연극계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전략적인, 혹은 ‘생존’적인 움직임이었다. 당시의 핵심 과제가 ‘어떻게 스타를 무대로 데려올 것인가’였다면, 현재는 최정상 배우들 스스로 무대를 ‘찾아오는’ 혹은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그 배경에는 미디어 산업의 급격한 지각변동이 자리하고 있다.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며 K-콘텐츠의 판을 키우는 동안, 배우들의 출연료와 드라마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13년 편당 약 3억 7000만원 수준이던 드라마 제작비는 10년 만에 수 배에서 10배 이상 급등했다.
회당 출연료가 수억 원에 달하는 스타 배우들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국내 OTT와 방송사들은 드라마 제작을 대폭 축소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수치는 이 위기를 명확히 보여준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드라마 제작 편수는 2022년 141편, 2023년 123편, 2024년엔 100여편이었다. 올해는 80여편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최정상급 배우들조차 출연 기회가 줄어드는 현실을 의미하며, 이들이 새로운 활동 무대를 모색하게 만드는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활동할 작품이 물리적으로 감소하자, 연극 무대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물론 스타들의 연극행을 단순히 일감 부족으로 인한 ‘피난’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연극 무대만이 줄 수 있는 예술적 성취감과 배우로서의 초심을 되찾으려는 명분은 2010년을 전후한 ‘스타 마케팅’ 시기부터 꾸준히 언급되어 왔다. 하지만 과거와 달라진 점은, 이러한 내적 동기가 미디어 산업의 위기라는 외부적 요인과 맞물리면서 더 강력하고 절실한 선택지가 되었다는 점이다.
연극 '벚꽃동산'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전도연(오른쪽)과 박해수 ⓒLG아트센터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으로 극단 학전에서 데뷔한 황정민은 연극을 통해 자신의 연기를 재정비하는 대표적인 배우다. 그는 연극 무대를 통해 배우로서의 기본기를 다지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27년 만에 ‘벚꽃동산’으로 무대에 복귀한 전도연 역시 마찬가지다. 전도연은 ‘벚꽃동산’으로 복귀할 당시 “연극에 대한 갈망이 늘 있었지만 두려움이 컸다”면서도, 연극을 보고 “배우로서 피가 끓는 것을 느껴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는 편집과 재촬영이 불가능한 무대 위에서 관객과 직접 호흡하며 느끼는 날것의 현장감, 즉 ‘힐링’과 ‘무대 경험’이 주는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증명한다.
한편, 연극은 기존 이미지를 탈피하고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배우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장이 되기도 한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로 첫 연극 무대에 섰던 유승호는 “배우로서 가진 기술이 부족하고 배울 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이들은 매체 연기와 무대 연기의 근본적인 차이를 절감하며,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고자 한다.
흥행 성적표로 증명된 성공스타 캐스팅은 연극 시장에 즉각적인 흥행으로 이어졌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데이터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의 침체를 벗어난 공연 시장은 2023년 티켓 판매액이 약 5600억원을 넘어서며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수준을 상회했다. 전체 공연예술시장 규모 역시 1조 4227억원으로 전년 대비 46.3% 급증하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러한 성장의 중심에는 스타 배우들이 이끈 대극장 연극이 있었다.
전도연과 박해수가 출연한 ‘벚꽃동산’은 객석 점유율 95%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4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연극 사상 최고가인 VIP석 11만원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KOPIS 예매 순위 1위를 기록하며, 스타 파워가 가격 저항선을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음을 입증했다. 황정민 주연의 ‘리차드 3세’와 ‘맥베스’ 역시 98%에 달하는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며 ‘믿고 보는 배우’의 티켓 파워를 과시했다. 이들이 출연한 작품은 2024년 총결산 연극 티켓판매액 상위 10개 공연에 차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스타 캐스팅이 가져온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K-연극’의 세계화 가능성이다. ‘벚꽃동산’이 홍콩 아시아플러스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초청되고 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 무대에 오르는 것은 한국 연극사에도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해외 진출이 가능했던 핵심 동력은 단연 주연 배우 전도연과 박해수의 국제적인 인지도다. 이들의 K-드라마 팬덤이 한국 연극에 대한 생소함의 장벽을 낮추고, 해외 관객과 공연계의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한 것이다.
한 공연 관계자는 “연극계는 유명 스타들의 등장으로 확실히 변화하고 있다. 특히 K-콘텐츠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K-뮤지컬과 마찬가지로, K-연극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다만 연극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다른 공연 예술 장르들과 대비해 해외 관객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은 스타 배우들에 대한 관심,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맞물리면서 연극 장르에 있어서도 세계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는 교류의 지점들이 생길 수 있을 거라고 본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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