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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메모리즈②] ‘기생충’의 처음과 끝에 그가 있었다, ‘내가 죽던 날’ 이정은


입력 2020.11.06 14:58 수정 2022.01.21 08:15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 현장. 배우 이정은, 봉준호 감독, 배우 송강호(왼쪽부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 현장. 배우 이정은, 봉준호 감독, 배우 송강호(왼쪽부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10년이 넘은 일이라 제목처럼 기억에 의존해 반추해 보면, 배우 이정은을 처음 본 건 2008년이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쪽이 아닌, 그 길 건너 그것도 4번 출구 위쪽의 소극장에서 뮤지컬 ‘빨래’를 봤다. 당시엔 혜화역을 나서면 숱한 배우지망생이 “날 보러 와요” 티켓 할인권을 나눠 주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창작 뮤지컬 ‘빨래’를 보러 갔다.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다시 만난 뮤지컬 ‘빨래’ⓒ 방송화면 캡처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다시 만난 뮤지컬 ‘빨래’ⓒ 방송화면 캡처

작지만 알차고 탄탄한 만듦새에 매우 만족하며 신나게 관람했는데, 모두가 잘했지만 유독 눈에 띄는 한 배우가 있었다. 공연을 보고 나오며 친구와 그 배우 얘기를 했다. “할머니 역이랑 직원 역할 1인 2역 맞지? 와, 진짜 너무 잘하지 않냐?”.


한참을 잊고 있다가 영화 ‘전국노래자랑’ ‘변호인’ ‘곡성’ 등에서 발견하니 반가웠다. ‘아, 저렇게 쓰일 내공이 아닌데’ ‘그래, 시작은 모두가 이렇게 하는 거지’ 혼자 입맛을 다셨다. ‘재심’ ‘택시운전사’, 점차 배역이 커지는데 너무 반가웠다. 사회에서 설 자리가 좁아지는, 또래 인생을 응원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늦되는 이 크게 된다고, 이정은 배우의 대기만성을 기원했다.


보라색 드레스가 돋보였던 배우 이정은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라색 드레스가 돋보였던 배우 이정은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리고 지난해, 제72회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이정은을 보는데 괜스레 내가 뿌듯했다. 보라색 실크 드레스가 너무 예뻤다. 당당해 보였다. 뤼미에르 극장에서 ‘기생충’을 처음 보는데, 연기 잘하는 줄 알았지만 배우 이정은의 문광 여사는 정말이지 끝내줬다. 영화 ‘기생충’이 폭풍전야를 지나 드디어 폭풍이 휘몰아치는 시점, 쫓겨난 문광 여사가 빗속을 뚫고 ‘초인종’을 누르면서 영화는 롤러코스터를 탄다. 전원 백수 기택네 가족이 위장과 가장으로 박 사장네 전원 취업한 것이 바탕을 깔았다면 지하실에 있는 남편이 굶어 죽을까 봐 데리러 온 문광 여사의 방문이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시작 버튼’이다. 그 중요한 역할, 기폭제 역할을 이정은은 훌륭히 해냈다. 기능적으로 작품이 필요한 만큼만 한 게 아니라 인상적으로, 개성적으로 열연했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가사도우미 얘기를 하는 해외 영화관계자의 이야기도 들렸다.


기자회견장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봉준호 감독과 김기택네 가족(송강호, 장혜진, 박소담, 최우식), 박 사장 부부(조여정, 이선균)가 참석했다. ‘아, 문광 여사가 빠지다니…말도 안 돼!’ 아쉬웠다. 동시에 더욱 멋지게 여겨졌다. 레드카펫에 서는 것으로도 기꺼이 일정을 쪼개 칸을 찾는 모습. 그리고 더 멋져 보인 건, ‘아카데미 레이스’라 불리는 영화 홍보의 대장정에 봉준호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송강호 배우 곁을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지킨 게 배우 이정은이라는 것이다. “제가 시간이 제일 많았어요”라고 말했지만, 본인에게도 좋은 경험이고 다른 배우들의 촬영 일정 등이 여의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흔하지 않은 기회를 누구나 움켜잡지는 못한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배우 이정은 그 뒤 영화 ‘기생충’이 최고점이 아니었다는 듯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와 ‘동백꽃 필 무렵’을 위해 자신의 ‘내공 은행’에서 일부를 인출했다. 그리고 오는 12일 개봉하는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제작 오스카10스튜디오·스토리풍, 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을 통해서도 다시금 깊이와 무게감을 발산 중이다. 공동주연인 김혜수와는 동갑인데, 두 배우의 완전히 다른 분위기와 색깔이 서로를 지켜주면서도 한데 어우러져 신선한 하모니를 맛보게 한다. 일찌감치 스타였던 김혜수, 늦깎이별 이정은을 보며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덤이다. 일찍 시작했지만 3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어도, 연극에서 영화로 둥지를 옮긴 뒤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어도 우리가 못 봤을 조합 아닌가.


상처를 토닥여 주는 ‘우리의 엄마’ 순천댁,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상처를 토닥여 주는 ‘우리의 엄마’ 순천댁,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아픔을 겪는 김현수(김혜수 분)를 그보다 먼저 아픔을 겪고 먼저 어른이 된 순천댁(이정은 분)이 가슴으로 안아 주는 이야기, 영화 ‘내가 죽던 날’. 연기적 앙상블뿐 아니라 두 배우의 인간적 친밀감이 흠뻑 묻어난 영화, 목소리를 잃고도 아니 잃어서 더욱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는 이정은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을 놓치지 말자. 마음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거나 지금 ‘마음의 연고’가 필요한 당신이라면 더욱.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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