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D:인터뷰] 신빠람 이박사 “내 인생사 듣고 울지 않을 사람 없을 걸요?”


입력 2020.09.11 08:17 수정 2020.09.11 08:18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빅대디 엔터테인먼트 ⓒ빅대디 엔터테인먼트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다 우연한 기회에 메들리 음악을 녹음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1989년 국내 트로트 시장을 발칵 뒤집은 ‘신바람 이박사’가 탄생했다. 테크노와 EDM을 결합한 노래를 만들어내면서 트로트의 새 지평을 연 인물로도 불린다. 최근 빅대디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신곡 ‘술이 웬수다’를 발표하면서는 이름을 ‘신빠람 이박사’로 바꿨다. 더 강력한 ‘신빠람’을 주겠다는 의도다.


‘술이 웬수다’는 신나는 비트로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여기에 긍정적인 메시지까지 더해져 듣는 이들에게 활력을 준다. 기존 이박사 특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했던 곡들과는 분명 다른 지점이 있다. 평소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불렀던 이박사가 ‘선뜻콜’에게 곡을 받았다.


“배우는 건 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제가 잘 모르는 술 문화, 젊은 층의 문화를 배울 수 있었죠. 이번엔 신세대를 겨냥한 곡입니다. 전 술을 하지 못하는데, 매니저가 우연히 ‘술이 웬수다’ ‘돈이 웬수다’라고 말하는 걸 듣고 곡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 작업이 시작됐죠. 현실이 그렇잖아요. 요즘 돈을 벌려고 밤을 지새우고, 힘들어서 술을 마시는데 그게 또 많은 문제를 일으키잖아요. 술을 많이 마시는 3040 세대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웃음)”


신곡에서도 돋보이는 건 이박사 특유의 톤과 창법, 그리고 추임새다. 록과 경기민요, 정통 트로트, 세미트로트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배웠던 덕분에 자유자재로 창법을 변화시킨다. 특히 ‘이박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임새는 경기민요를 배운 경험이 바탕이 됐는데, 지금은 그만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제 음악은 ‘락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통 트로트도 아니고, 정통 민요도 아니고, 그렇다고 록은 더더욱 아니고요. 여러 장르가 섞여있죠. 실제로 제 음악들을 들어보면 독특하게 느끼는 지점이 있을 겁니다. 하나의 곡에 전주와 간주가 다른 곡 들어 보셨어요? 예를 들어 전주가 정통 트로트라면 간주를 록인 셈이죠. 또 1절과 2절의 멜로디가 다르기도 하고요. 아마 아무도 내 악보를 이해하지 못할 걸? 하하”


자신의 음악에 있어서 분명 고집이 있지만, 새로움에서 얻는 쾌감도 크다. 그는 여러 방면으로 새로운 음악에 도전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트로트 정신을 이을 후배·제자를 키우는 것이다. 현재 그는 조찬찬, 금산, 김종만, 전철근, 모정희, 임소예, 김선아 그리고 자신의 딸 금도희 등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세월과 역사는 흘러도 근본과 뿌리는 버리지 말라는 조언을 가장 강조하는 것 같아요. 새로운 것들을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정통 뽕짝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박사는 신나는 걸로 했지만, 내 후배들은 또 그대로 따라 해선 안 되죠. 세상에 하나는 있어도 둘은 있을 수 없잖아요. ‘제2의 누구’로 불리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들의 노래로 연습을 할 수는 있지만 닮지도 말고, 따라하지도 말라고 말해주곤 합니다. 노래는 모두 다르고, 부르는 사람도 다르니까요”


ⓒ빅대디 엔터테인먼트 ⓒ빅대디 엔터테인먼트

앞서 나몰라패밀리, 임창정, 미미시스터즈 등 타 가수와의 협업을 해왔던 것처럼 지금도 함께 호흡을 맞출 가수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최근에는 트로트 열풍의 주역이기도 한 TV조선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 류지광, 김호중과의 협업을 기대한다고.


“류지광과 김호중에게 눈길이 가더라고요. 그들은 매력적인 저음을 가지고 있고, 제 보이스는 고음이니까요. 하이와 로우가 함께 하면 더 풍성한 곡이 완성될 것 같아요. 제가 젊은이들에게 의지하는 걸 수도 있겠네요. 하하”


매번 신나는 음악으로 대중들에게 ‘신빠람’을 일으키겠다는 이박사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아마 내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굴곡진 삶을 이겨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대중이 그의 음악에 더 공감하고,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말이다.


“과거엔 130곡을 부르고도 제대로 된 돈을 받지 못했고, 1995년도까진 거의 무명에 가까운 생활을 했죠. 95년도 이후엔 일본에 진출해서 앨범을 냈는데 첫 앨범부터 100만장이 팔렸어요. 우연치 않은 기회였고, 큰 기대도 없었는데 깜짝 놀랐죠. 동경대학교에서 한국의 트로트에 대해 강연도 했고요. 인지도를 쌓고 앨범으로는 성공을 했지만, 정말 힘든 생활이었어요. 음식이 정말 안 맞더라고요. 심지어 상해서 버렸던 김치를 물에 씻어서 먹기까지 했다니까요. 하하. 그 정도로 한국 음식이 그립더라고요”


그렇게 국내로 돌아온 이박사는 ‘몽키매직’ ‘영맨’ 등의 곡을 히트시키며 2000년대 초반까지 큰 사랑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의 전성기는 짧게 끝났다. 사고로 다리 부상을 당하면서 활동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공백기 동안 사기를 두 번이나 당했고, 2년간 차있던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면서 위약금까지 배상해야 했다. 생활고로 이혼까지 하는 상황을 맞아야 했다. 참 다사다난한 인생이다.


“이젠 흘러가는 대로 가려고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그대로 이뤄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내 음악을 열심히 하다 보면 결과도 뒤따를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신곡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나라는 사람 ‘신빠람 이박사’를 통해 대중들을 더 신나게 해주고 싶습니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