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1일 마산구장, 1위 두산을 상대로 5-6 1점 차 뒤진 9회초에 NC의 6번째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장암 투병 이후 오랜 치료와 재활을 이겨낸 원종현이 592일 만에 1군 마운드에 선 순간이었다.
여느 투수라면 긴장할 법도 한 장면이었지만 원종현은 달랐다. 첫 타자 오재원을 상대로 초구 시속 148km 속구로 헛스윙을 끌어낸 원종현은 두산의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날 패스트볼 최고구속은 시속 152km. 2014시즌 준플레이오프에서 기록한 155km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좀 더 예리해진 슬라이더를 가미해 상대 타자들을 제압했다. 이날 NC가 5-6으로 패하며 빛이 바랬지만, 원종현의 화려한 복귀는 많은 이들을 흥분시켰다.
이후 팀이 필요로 할 때마다 등판하며 승리에 기여한 원종현은 두 달 가까이 시즌을 늦게 시작했음에도 올 시즌 총 54경기에 등판해 70.2이닝 동안 3승 3패 3세이브 17홀드 평균자책점 3.18을 기록했다.
75개의 삼진을 잡는 동안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는 단 0.98에 불과했다. 한 이닝에 출루를 허용한 타자가 1명에 미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30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 중에서도 단연 1위이며 올 시즌 역대급 타고투저 현상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2014시즌의 원종현은 다소 거칠었다. 정규리그 73경기에 나서 71이닝 동안 5승 3패 1세이브 11홀드 평균자책점 4.06을 기록했다. 73개의 삼진을 잡아내면서 기록한 WHIP는 1.31이었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구사하는 투피치 투수였지만 150km를 넘나드는 패스트볼을 주로 구사했고 그 비율이 80%에 육박할 정도로 직구에 의존하는 스타일이었다.
원종현의 복귀 전후 투구기록. (기록출처=스탯티즈, KBReport.com)
하지만 올 시즌 원종현은 슬라이더 비율을 더 높였고, 2년 전 13.2%에 불과했던 슬라이더 구사율은 올해 30% 이상으로 크게 증가했다. 슬라이더가 늘어나자 타자들의 눈과 방망이를 현혹시켰다. 원종현의 올 시즌 피안타율은 0.235에서 0.197로 내려갔고, 타석 당 삼진률과 볼넷 비율 또한 각각 23.4%에서 25.6%, 9.9%에서 6.4%로 변화하면서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슬라이더 구사율의 증가는 구종 가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구종 별로 실점을 얼마나 억제했는지, 즉 구위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는 지표다. 스탯티즈에서 제공하는 기록에 따르면 2014년 원종현의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구종가치는 각각 6.8과 -1.6이었다. 구종가치가 음수로 산출되는 것은 해당 구종이 리그 평균보다 더 많은 실점을 허용했음을 의미한다.
많은 투수들이 주무기로 삼는 패스트볼을 제외하면 구사율 자체가 높지 않고, 투수들마다 구사하는 구종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원종현의 슬라이더는 빼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만큼 패스트볼에 의존하는 단순한 볼배합을 사용하면서 타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쉽게 공략 당한 원종현이었다. 그러나 올 시즌 원종현의 슬라이더 구종가치는 5.3으로 매우 좋아졌다. 패스트볼의 구종가치도 동반 상승하여 7.2를 기록했다. 불펜 투수로서 한 단계 이상 업그레이드됐음을 의미한다.
야구기록실 KBReport.com에서 제공하는 RA9-WAR(9이닝 당 평균 실점률을 반영한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에서도 원종현의 가치 향상을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원종현의 RA9-WAR은 1.55로 NC 전체 투수 중 8위였다. 그러나 2016시즌엔 1이상 늘어난 2.61을 기록하면서 팀 내 5위, 불펜투수들 중에서는 마무리 임창민 다음으로 높은 수치를 기록하면서 확실한 셋업맨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원종현은 시즌이 끝난 뒤 2017 WBC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지난 10일에는 투병 생활 기간 중 의지가 되어준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리는 경사도 있었다.
리그 정상급 불펜으로 복귀한데 이어 겹경사가 이어지고 있지만 불과 2년 전만 해도 선수 생활의 기로에 섰던 원종현이다. 2015년 스프링캠프에서 어지럼증을 느끼고 귀국한 원종현에게 대장암 2기 판정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2015년 1월 29일 종양 제거 수술 이후 무려 12번의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한 시즌을 통째로 건너뛰었고 체중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인고의 시간을 극복한 끝에 한층 더 예리해진 슬라이더를 장착하고 1군 마운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한 단계 이상 업그레이드된 피칭을 보여준 원종현은 2017시즌 가장 주목해야 할 불펜 에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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