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신화, 과연 '불굴의 도전정신' 때문이었을까?

박영국 기자

입력 2015.11.16 13:43  수정 2015.11.16 15:26

<탄생 100주년 기획-아산 정주영에게 배운다(상)>

'불굴의 도전' 이면에 '치밀한 검토'와 '확고한 신념'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현대자동차그룹

대한민국 창업 1세대들이 물려준 제조업 강국의 위상이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중국 등 후발국들의 추격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이 강세를 보여온 대부분의 제조업 분야가 레드오션화되며 중소·중견기업은 물론 굴지의 대기업들조차 도산과 구조조정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런 때일수록 창업 1세대들의 기업가 정신을 본받아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 경제부흥기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기업가인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통해 현대 기업인들이 본받아야 할 기업가 정신을 되새겨본다.<편집자 주>

“정보산업사회란 첨단기술을 이용하는 사회라는 뜻이다. 그러나 첨단기술에 대한 선진국의 국가주의적이고 독점적인 성격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같은 정보산업사회라 하더라도 선진국 정보산업의 식민지가 되는 정보사회와, 주체적인 정보산업사회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가장 본질적인 도전은 바로 이 첨단기술의 자체 개발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범용 기술로는 저렴한 인건비를 앞세운 후발국들의 추격에 시장을 내줘야 하고, 첨단기술을 활용하려면 힘들게 제품을 만들어 번 돈을 선진국에 로열티로 지불해야 하는, 현재의 국내 기업들이 처한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충고다.

‘원천기술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충고가 나온 시점은 놀랍게도 무려 30여년 전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1984년 11월 16일 관훈클럽 연설에서 한 발언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의 이미지는 ‘불굴의 도전정신’의 표상으로 굳어져 있다.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울산 미포만 지도 한 장만으로 외국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고, 조선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박 수주를 받은 일화, 서산 간척사업에서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악아 공기를 단축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도입한 일화 등은 맨 손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선구자의 이미지와 동시에 무모한 일도 무조건 도전하고 보는 ‘불도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조선소 건립을 위한 차관 도입 당시 상환 능력과 잠재력에 의문을 표하던 영국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 앞에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꺼내 놓은 500원짜리 지폐. 정주영 회장은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이미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철선을 만들기 시작한 영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쇄국정책 때문에 산업화가 늦어졌지만, 한번 조선을 시작하면 몇 백 년 동안의 잠재력이 분출돼 나올 것이다”라고 설득했다.ⓒ아산정주영닷컴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정 명예회장의 ‘불도저식 리더십’이 산업화 시절에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기업 환경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도전’은 했을지언정 ‘무모’하지는 않았다. 생전에도 스스로 자신의 도전이 치밀한 계산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1990년 5월 현대그룹 사보와의 특별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불굴의 도전, 모험정신 이것으로 누구나 다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치밀한 검토와 확고한 신념(信念)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현대를 모험을 하는 기업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현대는 모험을 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현대 계열기업은 어느 것 하나 실패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밖에서 볼 때 현대가 속단하고 창험(昌險)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치밀한 계획, 확고한 신념 위에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기 때문에 실패를 모르는 것이다.”

30년 후에도 깊이 새길 만한 ‘원천기술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발언 역시 자신이 현대그룹을 이끌어오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코엑스에 전시된 현대자동차 포니2와 현대중공업 유조선 모형을 지켜보고 있다.ⓒ아산정주영닷컴

정 명예회장이 현대자동차를 통해 국산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66년으로, 당시 미국 포드와 자동차조립생산 계획을 맺고 합작회사 형태로 승용차를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국내에 딱히 경쟁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 방식으로도 돈벌이가 되기엔 충분했지만, 정 명예회장은 조립생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100% 우리 노력으로 국산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우리 기술과 고유브랜드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만이 앞으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우리나라의 기계공업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결국 현대자동차는 포드와 결별하고 1976년 1월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인 ‘포니’ 승용차를 만들어 냈다. 이후에도 정 명예회장의 지휘 하에 자체 기술로 고유모델 개발에 힘쓴 현대자동차는 10년 뒤인 1986년 ‘포니엑셀’을 앞세워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미국에 진출한 현대자동차 고유브랜드 ‘엑셀’의 인기는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미국진출 약 4개월 만에 5만2400대가 판매되며 1958년 프랑스 르노사가 세운 수출개시 1년 간 최다판매기록을 불과 4개월만에 경신했다. 미국 진출 첫해 수출 물량은 20만3000대에 달했다.

이어 1987년에는 일본의 유수한 자동차 회사인 도요다, 닛산, 혼다 등을 누르고 미국시장 수입 소형차판매 1위를 차지함으로서 한국의 높은 자동차공업 수준을 세계에 알렸다.

만일 당시 정 명예회장의 ‘기술자립’ 의지와 ‘국산 고유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현재 세계 5위 자동차업체로 군림하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성공 신화도 없었을 것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4일 서울 동대문플라자에서 열린 '제네시스' 브랜드 런칭 미디어 설명회에서 브랜드 런칭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현대자동차

정 명예회장이 대한민국에 남긴 유산 중 하나인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럭셔리 브랜드 ‘제네시스’ 론칭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며 그의 기업가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정 명예회장의 손자인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제네시스 론칭 행사 현장에서 이같이 말했다.

“현대자동차에는 선배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산업화 시절의 정신이 아직도 많이 흐르고 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자산과 기반을 가지고 있는 만큼 더 큰 자신감이 있다.”

'정주영식' 기업가정신은 비단 현대가 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쟁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기업가들에게 다양한 변주를 울리면서 창의적 도전에 나서게 하는 등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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