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의 박흥식이 친일파? 그야말로 한국판 쉰들러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5.07.11 10:01  수정 2015.07.11 10:01

<굿소사이어티 서평>징용 면제해주려고 독립운동가 후손 우선 채용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 정신' 김용삼 지음 프리이코노미스쿨 펴냄
일제 식민지시절에 근대적 의미의 제조업이 대거 출현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한국인들은 짐짓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엄연한 통계수치를 무시하는 건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이를테면 1910년 무렵 10인 이상 고용한 공장은 한반도에 151곳이 있었는데, 한국인 소유는 39개에 불과했다. 개항 직후 30년, 일본자본이 밀려들어온 탓이다. 그러나 1939년 무렵엔 5인 이상을 고용한 공장 6953곳 중에서 한국인 소유는 4185개로 늘었다.

그 뿐인가? 1911년 한국인 단독 설립회사는 27곳에 납입자본금 270만 엔에 불과했던 것이 1939년엔 2385개에 납입자본금은 1억4331만 엔에 달했다. 그런 한국인 회사 중 가장 성장했던 간판 기업이 인촌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가 세운 경성방직(주)(이하 경방)이었다. 1930년대에 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만주 대륙을 호령했으며, 일본 오사카에 진출했으니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었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있다면, 일제시대에는 경방이 있었다는 게 정확한 말이다. 경방이 한국인이 경영한 근대기업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변함 없다. 필자가 섣부르게나마 이런 정보를 얻게 된 것은 학술서 두 권 덕분이다. 카터 J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가 쓴 '제국의 후예'(2008년 푸른역사 펴냄), 그와 쌍벽을 이루는 경제사학자 주익종 박사의 저술 '대군의 척후'(2008년 푸른역사 펴냄)가 문제의 책이다.

오래 전 이 책을 접한 뒤 20세기 중반 이후 기적처럼 성장한 한국경제 성장의 전사(前史)을 파악했다는 느낌이 들었고, 한국인의 통념과는 또 다른 내용이지만, 책 두 권이 주장하는 학문적 진실이 흥미로웠다. '제국의 후예'를 쓴 에커트 교수는 하버드대 대학원생 시절 미 평화봉사단 출신으로 한국에 8년간 체류(1969~1977년)했다. 어떤 학자는 “에커트 책을 읽은 뒤 판에 박힌 민족주의 사관을 벗어났다”고 환호했다.

어쨌거나 한국경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책들은 새삼 일깨워준다. 1960~1970년대 개발연대 한강의 기적 역시 우연이 아니며, 그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과의 연속성과 ‘단절적 축적의 과정’ 속에서 가능했다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그런 게 실로 역설인데, 또 하나 경제-경제사, 산업-산업사 관련 책이 이토록 흥미로운 읽을거리라는 걸 확인하는 즐거움도 컸다.

산업-산업사 관련 책이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나?

그리고 이 지면에서 또 하나의 훌륭한 산업-산업사 관련책을 소개하게 돼 기쁘다. 김용삼의 신간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 정신'(프리이코노미스쿨 펴냄)이 문제의 저술인데, 고백하지만 필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 몰랐던 걸 아는 즐거움은 물론 가슴 뭉클한 감동까지 맛보았다. 조금 전 언급한대로 한국경제의 기적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는 것의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실상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의 뚝심도 예사롭지 않았다.

“얼마 전 여의도 전경련회관을 크게 새로 올렸을 때 그쪽 관계자들에게 산업사박물관을 만들어 많은 이들이 관람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가 강조했습니다. 그게 한강의 기적을 만든 나라다운 당연한 임무가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쉽게 동의하는 표정들이 아니에요.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았거나 자료도 없으니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는 식인데, 그럼 저라도 책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굳혔죠.”

근래 만났던 저자는 이렇게 말했는데 스스로 다짐했던 결과물이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 정신'이다. 그는 '월간조선' 편집장 출신. 기자생활 때 ‘황장엽 망명사건’ 특종 보도로 1997년 대한민국 언론상을 수상했고, 2008년 장보고대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미래한국' 편집장으로 근무 중인데, 1950년대 정치경제사 쪽에 밝으며 이승만 전문가이다.

몇 해 전 '이승만의 네이션빌딩'으로 성가를 올렸고, 이번 책 이전에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로 시장경제대상 우수상을 받은 바 있으니 그런 경험의 축적으로 이번의 책을 쓸 수 있었으리라. 독자 입장에서는 이 책을 통해 그 동안 몰랐던 걸 아는 즐거움이 크다. 이를테면 근대적 기업의 전신(前身)은 구한말 직후 등장했던 개성상인과 서울상인으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개항과 함께 조선에 진출했던 일본과 청국 상인에 대응해 국내 상권을 지켜낸 귀한 존재였다.

한국 상도(商道)의 상징인 개성상인의 후예들

놀라운 건 한국 상도(商道)의 상징인 개성상인의 후예 중 지금도 우리 삶에 친숙한 기업이 생각 이상으로 상당히 많다는 게 이 책에서 확인된다. 이를테면 아모레퍼시픽, 신도리코, 삼립식품, 오뚜기식품, 한국제지, 에이스침대, 한국야쿠르트…. 어언 1세기를 뛰어넘는 전통인데, 이들이 경영다각화 대신 전문분야 한 우물을 파는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개성상인들의 철칙은 “현금을 가지고 사업하라”라는데, 그런 DNA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서울상인? 한강의 배를 이용해 국가 조세곡물과 양반들의 소작료를 운반해주며 부를 축척했던 그들 중 구한말과 일제시대 서울을 대표하는 3대 상인의 하나가 박승직이다. 배오개(종로 4~5가 일대)에서 포목상으로 출발해 객주를 거쳤던 그는 박가분이란 제품으로 화장품업계를 석권했다. 그게 지금의 두산그룹을 일구는 모태가 됐다. 귀속재산 불하를 받는 과정에서 소화기린맥주를 불하받아 그게 OB맥주로 이어졌는데, 꽤 유명한 얘기라서 그걸 아는 이는 그래도 꽤 된다.

일제시대 본격적인 근대 기업가로 꼽히는 게 조금 전 언급한 경방, 그리고 박흥식의 화신이다. 단 그동안 몰랐던 건 경방이 1930년대 만주에서의 남만방적 시절 공장 여공을 위한 산업체병설학교를 세웠다는 점이다. 그게 1970년대 산업체병설학교의 원조쯤이 안될까? 경방은 공장 내 의료시설까지 갖춰 사원복지에도 앞장섰다. 놀랍지 않은가?

더 놀라운 건 따로 있다. 그 역시 1970년대로 훌쩍 뛰어 국내에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될 때 기업들이 앞장서는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저자의 귀띔이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용완 경방 회장은 “우린 1930년대 초보적 형태의 의보를 실시해왔다. 기회에 확대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걸 이 책은 일깨워주고 있다. 제조업에 경방이라면, 유통에는 화신 아니던가! 그걸 이끌었던 박흥식이야말로 ‘괴물’이고 연구대상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재확인했다.

화신의 박흥식이야말로 문제적 인간

해방 후 좌익 일부는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쇼윈도에 “노동자의 착취자 박흥식을 처단하라”는 벽보를 붙이며 위협했다. 들끓던 반민특위에 회부됐으나 무죄선고를 받았고, 그래서 필자 역시 예전엔 그를 좀 미워했던 게 사실이었는데, 그는 알고 보니 애국자였다. 일제 말기 일본의 등쌀에 비행기공장을 차려야 했던 그는 무려 2800명을 긴급채용 방식으로 고용했다. 그것도 주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우대했다.

이 땅의 젊은 인적 자원들에게 징용 면제 혜택을 주기 위한 조치였는데, 지금 그걸 재평가해주는 이는 드물다. (이를테면 필자의 상상력으론 영화 ‘쉰들러 리스트’이상 가는 소재인데, 이런 걸 영화 만들 용기 있는 사람은 없을까?) 대신 우리는 그런 멀쩡한 사람을 친일파로 모는데 열중한다. 놀라운 건 박흥식의 재기(再起)다. 그는 1950년대 말 원전(原電) 건설을 정부에 제안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실제로 박정희 시절 정부가 원전발전소 1,2호기 건설할 때 박흥식의 화신이 움직였다고 한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대리점을 맡아 그 회사의 원전 도입을 성사시켰다. 필자는 서울 강남 개발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박흥식이라고 알고 있는데,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 정신'에 그 얘기가 사실로 확인돼 흥미진진하다. 1961년 박흥식은 6대 국가발전사업계획을 제출하는데, 맨 앞에 서울인구 분산을 위해 20만 가구 입주시키는 영동지구 개발사업(후에 강남개발사업으로 현실화 됨)이 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이란 드라마에서 진짜 주인공은 기업가들이라는 주장 대목이다. 정부 주도하는 계획에 기업들은 조연으로 참여했다는 통념을 뒤집는 내용인데, 이 책의 주장은 공허한 기업 칭찬이 아니다. 외자도입형 공업화 전략, 보세가공무역에서 중화학공업, 종합상세 제도까지 기업가들의 선 제안이 정책으로 채택됐다는 걸 하나 하나 밝힌다. 흥미진진한 그 얘기는 다음 회 서평2에 이어서 쓴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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