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00'의 스파르타, 명예로운 죽음을 숭배한 이유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입력 2014.12.28 10:03  수정 2014.12.28 10:08

<박경귀의 ad Greece 36>불패의 전설, 스파르타식 훈련의 탄생 비밀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스파르타를 생각하면 붉은 망토를 걸치고 청동방패와 청동투구로 무장한 전형적인 스파르타의 전사(戰士)를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 스파르타는 전사의 나라다. 공동기숙과 공동식사제도를 통해 병영생활을 함께 하면서 혹독한 군사훈련으로 단련된 전사들은 그리스 세계에서 무적의 강군이 된다. 이른바 ‘스파르타식’으로 양성된 군대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처음부터 탁월한 군대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정복국가 유지하기 위한 병영국가체제

BC 6세기경 스파르타가 ‘스파르타식 군대’로 거듭날 때 까지 이전의 수많은 굴욕적 패배가 밑거름이 되었다. 스파르타는 7세기경까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테게아에 밀리고 있었고, 동북부 아르고스 평원에 자리 잡은 강국 아르고스를 넘볼 수 없었다. 스파르타는 이들 국가와 싸워 여러 차례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스파르타가 불가피하게 병영국가가 되고 군사강국으로 올라서게 된 데에는 스파르타의 영토 확장 정책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타이게토스 산맥과 파르논 산맥 사이의 에우로타스 계곡에 위치했던 스파르타는 에우로타스 강 주변의 비옥한 땅을 갖고 있었지만, BC 7세기경에 인구가 팽창하면서 새로운 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스 본토의 여러 도시국가들의 경우에는 BC 8세기 중반부터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에게 해 연안 지역)나 흑해 연안,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아프리카 등지로 눈을 돌려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고 본토의 시민들을 이주시켰다. 인구 분산을 통해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고 또 식량 확보를 위한 전진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본토 도시국가들의 해외 식민지 개척은 그리스 문화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고, 본토에서의 도시 국가 간 충돌을 완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파르타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타라스(Taras, 오늘날의 타란토)를 개척했을 뿐 다른 도시국가에 비해 해외식민지 개척이 미미했다. 오히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반도 내의 다른 그리스 국가인 메세니아로 눈을 돌렸다. 타이게토스 산맥에 가로막혀 스파르타와 메세니아는 왕래가 적었지만 두 곳 모두 12세기와 10세기에 대거 도래한 그리스민족의 한 일파인 도리스족에 속했다.

스파르타가 영토 부족의 문제를 국내에서 해결하는 전략을 채택하면서 같은 그리스 국가인 메세니아 전체를 정복하여 전 시민을 농노, 즉 헤일로타이(heilotai)로 만들었다. 스파르타 인구의 20배가 넘는 메세니아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스파르타는 군대를 정예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파르타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메세니아인들을 잔혹하게 대했다.

고대 그리스의 메세니아 지도, 동쪽으로 타이게토스산을 경계로 스파르타가 위치한 라코니아 지방과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 아르카디아 지방에 접하고 있다. Jean-Denis Barbie du Bocage(1760~1825)의 1786년 작.

스파르타는 메세니아를 지배하기 위해 범국가적으로 전사문화를 만들어냈다. 스파르타 자유민이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한 것도 대표적인 정책의 하나다. 모든 자유민은 현역 전사가 되어야 했다. 그들에겐 라케다이몬과 메세니아의 땅이 배분되었고, 농사를 지어 스파르타를 먹여 살릴 국가 노예인 헤일로타이 역시 자유 시민들에게 할당되었다. 상업과 수공업은 반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에게 맡겼다.

스파르타 자유민은 농사와 상업, 수공업 등에서 해방된 대신 오로지 군사 훈련에 집중해야 했다. 이들의 유일한 소임은 국가를 보위하는 일이다. 국가와 영토를 지키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타국과의 전쟁에서 몸을 바쳐 싸우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 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헌신이 요구되는 스파르타 자유 시민만 국정의 중요사안을 결정하는 민회에서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튼 스파르타의 흥성과 쇠퇴는 자유 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유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스파르타가 소수의 자유민에게만 군대에 복무하도록 하고, 80%의 나머지 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정책은 늘 반란의 위험성이 잠재할 수밖에 없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스파르타가 매년 메세니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메세니아의 주민들을 살상한 이유도 반란의 싹이 트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스파르타가 강력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BC 4세기까지는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자유민 전사의 수가 감소하면서 스파르타의 전력(戰力)이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BC 371년경 스파르타의 성인 남자 자유민은 겨우 1천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전성기에 자유 시민이 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던 것에 비한다면 엄청난 전력의 손실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스파르타의 쇠퇴의 원인이 병력의 급감이었다고 진단했었는데 이는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럼에도 자유 시민과 반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 헤일로타이의 세 계층으로 이루어진 엄격한 사회계급을 유지하는 한, 노예인 헤일로타이로부터 군사를 충원할 수는 없었다. 다만 페리오이코이는 처음에는 자유민 중장보병의 보조병 역할을 하다가 병력이 부족하게 되자 자유민과 똑같이 중장보병으로 복무하게 했다.

따라서 군대에 충원할 자유 시민의 자원이 소진되면서 자연스럽게 스파르타의 국력은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복국가로 뻗어나가기 위해 자유 시민으로 구성한 엘리트 전사 체계는 종국에는 국가 쇠락을 부르는 부메랑이 되고 말았던 셈이다. 엄격한 계급 체제의 모순이 쇠퇴를 자초한 것이다. 테베의 걸출한 장군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BC 410? ~ BC 362)에게 BC 371년에 레욱트라 전투에서, 그리고 BC 362년에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함으로써 스파르타의 무적 신화가 깨진다. 스파르타가 신흥 군사 강국 테베에 무릎 꿇게 되면서 노예로 전락했던 메세니아는 230년 만에 해방된다. 리쿠르고스 체계가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임전무퇴의 군사 문화, 불패의 신화를 낳다

아무튼 스파르타가 BC 6세기에서 4세기까지 200여 년 동안 그리스 최강의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국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군사제도와 강력한 사회통제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작동했던 데 있었다. 스파르타가 만들어낸 특유의 사회문화는 많은 장점도 갖고 있었다.

7세기경 리쿠르고스가 단행한 사회 개혁의 영향으로 스파르타 전사들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상무정신이 충만했고, 시민들 사이에는 검소한 식사와 의복에 만족해하는 자연스러운 사회 문화가 형성되었다. 특히 투철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국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문화가 체질화되었다. 이러한 특장들이 당대의 많은 그리스 국가들의 선망을 받게 한 요소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최고의 권위를 가진 철학자들이 아테네 민주정의 무절제와 폭주를 질타하면서 스파르타의 정체의 이상적 요소에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스파르타의 상무적 문화는 전해지는 고대 스파르타의 유물들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시내에 있는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에는 당시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신전과 에우로타스 서쪽 강변의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고 주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화예술 작품들이 많은 아테네 등 다른 큰 도시의 박물관만큼 이곳의 전시물이 그렇게 풍성하지는 못하다. 그렇지만 용맹스런 스파르타 전사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은 다른 곳에 비해 많은 편이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의 외부 모습 ⓒ박경귀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의 내부 모습, 왼쪽 전시실의 일부이다. ⓒ박경귀

크라테르의 목 부분에 묘사된 전우의 시체 위에서 창으로 적을 공격하는 전사의 모습, 스파르타의 에우로타스 강둑에 있던 사자(死者)를 위한 예배소(Heroon)에서 발굴되었다. BC 600~575년 작품으로 추정,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청동 방패와 창, 그리고 닭의 볏 모양 장식을 한 투구로 무장한 스파르타 전사의 모습, 전차를 탄 전사의 긴 머리가 두드러진다. 스파르타 전사들은 모두 머리를 길게 길렀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봉헌물로 만들어진 작은 청동 조각들, 방패와 창, 칼로 무장한 전사의 모습이나, 말 등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스파르타의 군국(軍國) 체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 전사들의 용맹과 투혼을 강조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스파르타 시민은 전쟁에서 죽었을 경우에만 묘지석에 이름을 써 넣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예의 하나다. 스파르타의 유물도 무덤의 비석이나 석관의 부조에 용맹한 전사를 기리는 내용이 유난히 많다.

옥좌에 앉은 전사의 모습을 부조한 것도 여러 개 있다. 대개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전사가 죽은 후에 더욱 영웅시 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일반 전사는 살아서 옥좌에 앉을 수 없었지만, 영웅적 죽음이 그를 옥좌에 올린 것이다. 그리고 불사(不死)를 상징하는 뱀을 함께 부조했다. 필멸의 인간이지만 영웅적 행위로 인해 그는 신과 같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징물들은 스파르타 전사들이 죽음을 영예로운 일로 여기게 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영웅적 죽음을 기리는 한 부조, 옥좌와 불사(不死)를 상징하는 뱀이 전사의 영예를 빛내고 있다. BC 550~525 작품 추정,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영웅적 죽음을 기리는 무덤의 비석 부조, 옥좌와 불사(不死)를 상징하는 뱀이 사자(死者)의 영예를 빛내고 있다. BC 3세기 작품,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라케다이몬의 반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중무장 전사의 모습이다. 불사(不死)를 상징하는 뱀이 전사를 격려하고 있다. 이 묘석이 나온 곳은 마니 반도에 있는 아레오폴리스이지만, 페리오이코이 도시인 오이틸로스라는 곳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BC 5세기 작품으로 추정,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죽은 자의 묘석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낫을 걸기도 했다. 낫은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썼지만,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시간과 세월을 주관하는 크로노스(Kronos)가 자신의 아버지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를 거세시킬 때 사용했던 도구로써 죽음을 상징했다.

칼리크라테스(Kallicrates)의 아들인 트라시불로스(Thrasybulos)를 묘사한 봉헌 비석이다. 스파르타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발굴되었다. 1세기 작품으로 추정,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버지 우라니아를 낫으로 거세하는 크로노스, Giorgio Vasari(1511~1574)와 Cristofano Gherardi (1508~1556)의 작품,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소장

스파르타 전사의 용맹한 상무정신

스파르타의 엄격한 상비군 제도는 상무정신을 강화시켰다. 스파르타가 20년간 계속된 메세니아 정복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야한다는 정신을 내면화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이 메세니아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아테네의 절름발이 시인 티르타이오스(Tyrtaios)를 특별히 초청하여 선무(宣撫) 작전에 투입한 것도 크게 주효했던 것 같다. 그는 전사들에게 비겁한 사람의 결과와 용맹한 전사의 가치를 시로서 격려해주었다. 헤라클레스의 후예를 자부했던 스파르타 용사들은 이 시구의 가치들을 내면화했을 것이다.

“용맹한 사람이 최전선에 나가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씨 뿌린 들판과 도시를 버리고 달아나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늙은 아버지, 어린 자식과 착한 아내를 데리고
구걸하러 방랑하는 것은 가장 몹쓸 일이네.
그는 어디를 가나 경멸 받고
결핍과 조소와 멸시가 늘 그를 따라다니고
치욕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붙어 다니리라.
……
젊은이여, 굳세게 나란히 서서 싸우고
결코 겁을 먹고 물러서지 마라.
네 가슴속 마음을 용기와 당당함으로 무장하고
적과 전투가 벌어지면 네 생명은 잊어버려라.“


스파르타 전사들이 얼마나 용맹한 전사였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는 많다.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분전하여 전멸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와 300 전사들의 이야기는 그리스 세계의 전설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페르시아 전쟁 전적지 답사기에서 상세히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그리스 정벌에 앞서 전 헬라스의 전력과 사정을 파악하고자 스파르타 왕 출신의 데마라토스(Demaratos)와 나눈 대화를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침공에 앞서 전 그리스 국가들에게 ‘흙과 물’을 바치라고 요구했었다. 이에 대해 데마라토스는 “헬라스는 원래 가난한 나라로 지혜와 엄격한 법 덕분에 용기를 갖게 되었고, 또 용기 덕분에 가난과 독재를 물리칠 수 있었”다며, 헬라스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페르시아 왕의 제안을 스파르타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특히 페르시아 왕과 맞설 사람이 1,000명 안팎밖에 없다하더라도 그들은 페르시아 왕에게 맞서 싸울 것이라고 역설했다.

“라케다이몬인들은 일대일로 싸울 때는 누구 못지않게 잘 싸우지만 집단으로 싸울 때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옵니다. 그들은 자유롭지만 전적으로 자유롭지는 않사옵니다. 그들의 주인은 법이며, 그들은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법을 두려워하옵니다. 아무튼 그들은 법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데, 법의 명령이란 언제나 같사옵니다. 즉 아무리 많은 적군을 만나더라도 싸움터에서 도망치지 말고 대열을 지키며 버티고 서서 이기든 죽든 하라는 것이옵니다.”(역사 Ⅶ권, 102~105)

데마라토스는 스파르타인들의 국법 준수 문화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일깨워준 것이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그리스 정벌을 개시했다. 데마라토스의 경고는 무위로 끝났다. 데마라토스는 스파르타와 왕 클레오메네스와 불화를 겪다 왕위에서 쫓겨나자 적국인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크세르크세스 왕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스파르타인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몸이었지만, 그리스 세계가 유린당할 것을 우려하여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침공 방침을 스파르타에 미리 알려주는 비밀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두 겹으로 된 서판의 밀랍을 긁어내고 서판의 나무에 왕의 의도를 적은 후, 밀랍을 다시 서판에다 녹여 입혀 보냈던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이 아무런 표식도 없는 밀랍 서판의 의미를 해독할 수 없었을 때, 클레오메네스 왕의 딸이자 훗날 레오니다스 왕의 아내가 된 고르고가 서판의 비밀을 알아냈다. “밀랍을 벗기면 나무에 적힌 글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준 것이다.

아무튼 데마라토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공언한 내용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근위병 300명(정확히는 298명)은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투에서 수만 명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전멸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영원한 전설이 됨으로써 스파르타 군에게 불멸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나아가 페르시아 군에게는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리스 군에게는 투혼에 일깨워 페르시아 군을 몰아내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했다.

스파르타 시내에 있는 레오니다스 동상, 그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흙과 물을 바치라고 요구했을 때, “네가 와서 가져가라(Molon labe)“고 응대했다고 한다. 그의 동상에 그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박경귀

강인한 전사를 만든 스포츠 활동

스파르타는 군사들을 효율적으로 조련하고 감투정신(敢鬪精神)을 고양시키기 위해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다양한 체육 활동을 통해 체력과 정신을 단련시켰다. 같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고대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여 다양한 종목에서 경쟁했을 것이다. 스타디온 달리기(오늘날 200미터 달리기에 해당), 왕복달리기(오늘날 400미터 달리기에 해당), 장거리 경주,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멀리뛰기 등에 참가했을 것이다.

물론 복싱과 레슬링, 격투기 등 투기 종목도 있었지만, 스파르타는 이런 종목에 참가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일대일로 싸우는 이런 종목은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이다. 결코 승부에서 져서는 안 된다는 스파르타의 상무정신으로 볼 때, 대중 앞에서 패배를 시인해야 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싸우지 않는 것보다 싸워서 지는 것을 더 부끄럽게 생각했다. 스포츠조차 전투의 연장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스파르타 정신의 일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스파르타는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스포츠 강국이었다. 전사의 전투력의 일환으로 경기에 임한 그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대 올림픽은 BC 776년에 시작되었는데 제1회 경기부터 BC 720년 제15회 올림피아 제전까지 우승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의 국가에서만 나왔다. 그 중 엘리스, 메세니아, 스파르타의 선수가 거의 전 종목을 석권했다고 한다.

스파르타 시내에는 역대 올림픽 우승자의 이름과 종목, 참가 년도를 대리석에 새겨 기리고 있다. BC 720년부터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기록되어 있다. 아마 문헌으로 명확하게 입증되는 것만 기록했기에 14회 대회까지의 자국 우승 선수들의 이름은 명기되지 않은 것 같다. 이 홍보판에 기록된 고대 올림픽에서의 우승 종목을 보면 주로 스타디온(200미터 달리기에 해당)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스파르타의 청년들, 즉 전사들이 적진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훈련에 숙달되었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평시의 이런 체력은 전투 시 유효하게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스파르타 전사들은 평상시에 최상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에 열중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유난히 육체미를 숭상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듯싶다.

스포츠 경기의 참여나 운동을 통한 체력 단련 이외에도 스파르타 전사들은 야생동물 사냥도 즐겼을 것이다. 거친 산악과 들을 누비며 산짐승을 쫓는 일이야말로 최상의 야전 훈련에 적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멧돼지 대리석 상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생동감 있는 조각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마치 칼리돈의 멧돼지를 연상시킨다. 칼리돈에서 사람과 곡식을 해치던 멧돼지를 잡기 위해 전 그리스의 영웅들이 사냥에 참가했던 일도 있지 않았던가. 해발 2400미터가 넘는 험준한 타이게토스 산맥에는 아마 칼리돈의 멧돼지 못지않은 난폭한 들짐승들이 꽤 많았을 것이고, 스파르타 전사들의 사냥대회 또한 자주 열렸을 듯싶다.

4두 마차를 모는 경주의 모습이 담긴 화병,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엔마크라이다스(Enymakraidas)의 아들 다몬논(Damonon)이 체육대회에서 승리한 것을 기록한 기념비이다. 윗 부분은 아기오이(Agioi) 수도원의 벽에서 아래 부분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아테나 신전(Athena Chalkioikos)에서 발굴되었다. BC 5세기 말엽 작품,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스파르타 시가지에 있는 올림픽 기념물, 스파르타가 고대 올림픽 참가이후 현재까지 우승한 선수들을 기록하고 있다. ⓒ박경귀

멧돼지 대리석 상,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 두 개 더 있다. 트로이 전쟁과 연관된 유물이다. 하나는 헥토르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트로이인들이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몸값을 바치며 청원하는 내용이 담긴 부조물이다.

다른 하나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여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게 만든 장본인인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 혹은 미소년(美少年)으로 제우스신의 사랑을 받아 제우스신에게 납치되어 술을 따르는 시동(侍童)이 되었다는 신화가 얽힌 가니메데스로 추정되는 조각상이다. 이 부조와 조각상은 스파르타가 트로이 전쟁과 직결되는 이해당사자였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스파르타인들에게 트로이 전쟁은 신화나 전설이 아닌 선조들의 당당한 승전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었을 것이다. 당대의 유물은 당대인들의 사고와 감성을 반영하는 법이다.(다음 회에서는 미인의 나라, 양성평등의 나라 스파르타의 문화를 추적합니다)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작품 석관(Sarcophagus)의 부조의 일부이다. 헥토르(Hector)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그 몸값으로 말, 암포라, 방패 등을 바치며 탄원하는 모습이다. 아마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이가 헥토르를 죽였던 아킬레우스일 것이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왕자 파리스 또는 트로이의 왕 라오메돈의 아들로 아름다운 용모로 유명했던 가니메데스(Ganymedes)로 추정된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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