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부여 가림성에 위치한 사당서
태조왕건과 후삼국통일의 공을 세운 고려시대 명장 유금필 장군과 두 명의 부인, 장군의 부모 등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만든 신상(神像) 5구가 부여군 임천면 가림성(성흥산성)내에서 도난 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 신상은 각각 통나무에 얼굴을 조각하고,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와 눈썹, 수염을 그렸으며, 머리에는 검은색 두건을 썼다. 여자는 볼에 연분홍의 연지곤지까지 찍었으며, 남자의 몸통에는 청색, 여자는 붉은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이들 신상은 1995년 사당관리인 안내로 기자가 현장에서 찍은 사진만 유일하게 남았다. 4구의 신상은 높이가 약 50cm 정도로, 여자 1구는 키가 작았다. 5구의 신상은 독특한 형태로 문화재 지정유무를 떠나 국내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모습이었다.
부여 가림성에서 도난 당한 유금필장군 신상 1995년 촬영ⓒ최진연 기자
기자는 지난 8일 부여군에 소재한 관방유적을 취재하면서 가림성과 유금필장군의 신상을 기사화하려고 부여 고도문화사업소 여홍기 학예사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그는 “신상이 도난당한 것은 2003년이며, 장군의 사당관리가 허술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다. 또 "이 신상에 관해서는 문헌이나 어떤 자료에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한 장의 사진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당시 현장을 안내했던 관리인은 “첫 번째 상은 장군의 부친, 두 번째는 장군, 세 네 번째는 부인(2명),마지막은 장군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는 "신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약 3백년 정도이며, 사당은 유장군 후손들이 관리해왔고 신상의 형태가 마치 신령 같고 무서워 마을사람들은 접근조차 꺼렸다"고 전했다.
안내인은 특히 신상이 신문에 보도되면 유씨 가문에 영광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자는 신상의 도난이 우려돼 당시 기사화 하지 않았다.
백제산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가림성ⓒ최진연 기자
신상이 도난당한 후 지금까지 이 사실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신상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사진이 공개되면 소재가 곧 밝혀 질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용맹스럽고 드라마틱한 장군들일수록 신통력을 지닌 설화로 추앙해 떠받드는 무속인들이 있어 그들의 소행도 의심이 간다는 사람들도 있다.
유금필 장군과 가림성의 관계는 고려 초 장군이 이곳에 들러 빈민들을 구제했다고 한다. 사당에서는 해마다 후손들이 음력 3월에 제사를 지낸다.
임천은 백제 때 가림군이었다. 임천으로 지명이 붙은 것은 조선 태종13년(1413)부터다. 성흥산성(구 명칭)은 일찍부터 백제의 가림성으로 비정돼 오다가 2012년에야 옛 지명을 되찾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제24대 동성왕 23년(501)8월에 가림성(임천의 옛 이름)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에게 지키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백제 때 쌓은 성곽 중에서 축성시기를 밝혀주는 것은 지금까지 가림성이 유일하다.
지금은 사라진 유금필장군의 작은 사당ⓒ최진연 기자
당시 왕은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도록 명을 내렸지만 그는 몸에 병이 있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앙심을 품고 있던 백가는 반기를 들었다. 동성왕은 그해 11월 사냥 나갔다가 폭설에 마포촌 이라는 곳에서 머물게 됐다. 백가는 이때를 틈타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했다. 백가의 반란은 25대 무령왕이 즉위하면서 진압됐고 그는 참형돼 백마강에 버려졌다.
동성왕은 웅진시대 백제의 부흥기틀을 다진 왕이다. 웅진에 궁궐을 중수하고 임류각이라는 정자를 짓는가 하면, 가림성과 함께 우두성, 사현, 이산 등의 성을 쌓아 고구려와 신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동성왕의 부흥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막강한 나당 연합군은 황산벌을 함락하고 백제의 도읍지까지 손에 넣었다. 마침내 660년(의자왕)백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나라 잃은 백제의 민초들은 가림성에 다시 모여들었다. 산성 봉우리에서 조망되는 안개 속에 가려진 백마강변의 사비성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하지만 우두머리들의 내부분열은 나라를 위한 이들의 불사조 정신마저 빼앗아 갔다.
백제의 깃발을 세웠던 암반초석ⓒ최진연 기자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산성들은 조선 초에 대부분 폐성된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그러나 가림성은 조선후기까지 기능이 마비되지 않고 병사들이 주둔했다.
가림성은 성흥산(268m) 정상을 감싸 않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산성 둘레는 1.2km이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3~4m 정도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멸실됐으나, 서남쪽에서만 다듬은 화강석을 사용한 성벽이 노출돼 있다. 이 구간에서 견고한 백제시대의 뛰어난 축성술을 볼 수 있다. 성벽은 바깥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이 산성의 특징은 북쪽구간에서 석성과 토성을 연결시킨 형태를 갖췄으며, 토성에서 다시 작은 토축 보루가 붙어있다. 산성내 시설물은 동·서·남쪽에 성문지가 있으며, 그중에서 동문과 남문을 1996년 발굴조사 했다. 성문은 평문 형태이며, 성문지 주변의 성벽은 양쪽을 튼튼하게 쌓아 올렸는데 시대에 따라 다시 쌓은 것으로 확인 됐다.
동문도 조선시대 때 새로 개축하면서 문루를 세웠는데 성벽안쪽으로 문루를 들여다가 올렸기 때문에 성벽은 적대 기능도 할 수 있도록 했다. 동문의 폭은 약 5m, 길이는 7.5m이다.
남문도 동문처럼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산성의 정문인 남문은 폭 4m의 크기의 초석이 남아있다. 성문 앞에는 약 200m의 석축보루가 있었으나, 일제 때 성벽을 뜯어내 제방축조에 사용했다고 한다.
무명장졸들의 혼을 추모하는 충혼제ⓒ최진연 기자
유물은 문지바닥에서 조선시대 기와가 수습됐으며, 성벽 바깥에서는 백제의 기와가 발견됐다. 성내부에서는 건물터와 3곳의 우물터가 남아있다. 우물은 동쪽에 있는데 수량이 풍부해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정상에는 저수시설인 웅덩이가 남아있다.
고구려에 온달산성, 신라에는 삼년산성이 있다면 백제는 가림성이 있다.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임천면 소재지에서 북쪽방향으로 고개를 들면 7백년 묵은 고목이 우뚝 솟아 있어 한눈에도 범상치 않는 산세가 가림성이다.
산성에 오르면 계백장군이 이끈 5,000여명의 최후 결사대의 혈전장 황산벌과 백제 마지막 사비성이 한눈에 조망된다. 산성 가는 길은 성 아래까지 도로가 포장돼 있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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