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②>페르시아인들에 철저하게 파괴된 수니온 곶의 신전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주 >
아테네인에게 도시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과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은 제우스 못지않게 중요한 신이다. 이 두 신이 특별한 숭배를 받았던 것은 아테네의 사회문화적 특징과도 연관이 있다. 아테네는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를 제패하고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당연히 지혜와 용기를 갖춘 전쟁의 여신의 힘이 필요했고, 바다를 안전하게 누비기 위해 포세이돈의 가호가 절실했다. 이런 까닭에 아테나 신전과 포세이돈 신전을 여기저기 많이 건립했다. 두 신전이 함께 위치한 경우도 적지 않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내에 엘렉테이온 신전에 아테나와 포세이돈 성소를 함께 조성한 것이나, 수니온 곶에 포세이돈 신전과 아테나 신전을 가까이에 함께 건립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자신들의 삶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을 특히 더 경배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수니온 곶의 입지는 포세이돈의 경배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이다. 곶의 왼쪽 바다는 지중해의 여러 섬들을 향해 열려 있는 에게 해다. 동남쪽으로 여러 섬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진 키클라데스 제도가 길게 뻗어있다.
오른쪽 바다는 아테네로 진입하는 관문 항구인 피레우스 항과 살라미스 섬, 더 멀리 코린트 지협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로니코스 만(Saronic Gulf)이 펼쳐진다. 야트막한 산 위의 포세이돈 신전 앞에서 탁 트인 양쪽 바다를 바라보면 이곳이 아테네에게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피부로 느껴진다.
포세이돈 신전 오른쪽으로는 작은 만이 형성되어 있다. 하얀 요트 몇 척이 한가로이 떠있다. 이곳은 물살이 잔잔하여 조정경기의 대기 장소로 쓰기에 적합했을 듯싶다. 고대에 이곳에 포세이돈 신전과 아테네 신전의 방벽 수호 부대가 활용하는 군선의 선착장이 있었다.
수니온 곶과 포세이돈 신전이 중요한 만큼 아테네인들의 기원과 경배는 커지게 마련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아테네인들이 수니온 곶에서 4년마다 대대적인 조정경기 축제를 개최했다고 전하고 있다(Ⅵ 87). 아마 조정경기는 해군의 전투력 강화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연히 해전에서 신속한 돌진과 후퇴의 기술력과 힘을 배양하기 위해 삼단노선(Trireme)이 경기에 집중적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경기자들은 최고의 기량을 다투었을 것이다. 경기에 앞서 포세이돈 신에게 헌주(獻酒)하고 승리와 안전을 기원했으리라. 하물며 전쟁을 위해 아티카를 떠날 때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출발에 앞서 동물의 희생 제물과 귀한 보물들을 포세이돈 신전에 봉헌하는 의식을 거행했을 것이다.
봉헌물의 종류는 다양했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네가 살라미스 해전 이후 퇴각하는 페르시아 삼단노선 3척을 나포하여 코린트의 이스트모스, 살라미스의 아이아스 신전, ‘수니온 곶’에 각각 1척씩 봉헌했다고 기술했다(Ⅷ 121). 수니온 곶에 봉헌했다는 것은 곧 포세이돈 신에게 봉헌된 것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전의 상징을 아테나 신에게 봉헌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다양한 신전에 전쟁의 승리를 상징할 수 있는 전리품이나, 귀금속 등 보물, 특별히 제작된 예술작품들을 수시로 봉헌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앞 다투어 보물과 기념물을 봉헌하던 최고의 인기 신전은 물론 델피의 아폴론 신전이었다. 전쟁에 앞서 계시 받았던 신탁에 대한 감사의 답례였다.
신전 앞에 영구 봉헌되는 예술작품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쿠로스(Kouros) 석조상이다. 쿠로스는 ‘청년’이라는 뜻이다. 반듯하게 선 청년의 나신 모습을 한 쿠로스 상은 기원전 7세기경에 등장한 것 같다.
그리스인들은 나체의 청년상 ‘쿠로스’와 여인상 ‘코레(kore)’를 거대한 석조상으로 만들었다. 코레는 옷을 입은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이런 고대 조각작품이 등장한 시기를 아르카익(Archic)기로 부른다. 쿠로스는 신에 대한 봉헌이나 사자(死者)를 기리기 위해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니온 곶은 아르카익기의 대표적인 ‘쿠로스’가 출토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쿠로스는 포세이돈 신전 앞에 설치되었던 것이라 한다. 현재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가 2013년 7월 수니온 곶을 방문했을 때, 이 쿠로스를 꼭 보고 싶었지만, 아테네에서 일정이 촉박하여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었다.
올해 1월 말에 홀로 그리스 배낭여행을 갔던 이유도 아테네에 있는 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과 국립고고학 박물관의 찬란한 고대 그리스 유물들을 꼼꼼히 감상하고 싶어서였다. 이번에 ‘수니온의 쿠로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조각술이 좀 더 발전하여 세련된 모습을 한 쿠로스 작품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이집트 관에 소장된 인물 조각상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좋았다.
‘수니온의 쿠로스’는 BC 600년 경 작품으로 알려진다. 그리스 쿠로스가 만들어지던 시기의 효시적 작품 군에 속한다. 그리스 쿠로스의 가지런한 머리 형식, 양팔을 반듯하게 내리고 옆구리에 붙인 경직된 모습, 왼발을 내민 자세에서 이집트의 석조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 쿠로스는 인간 실물 크기보다 더 큰 180~200cm 정도의 거대 석상인데다 양팔과 양다리가 몸체에서 떨어지도록 조각된 점에서 난이도가 높은 예술작품으로 진보된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질 수 있는 대리석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몸통과 팔 다리의 공간을 만들어낸 조각 기량은 경탄할 만하다. 2차원의 부조와 달리 3차원의 입체 조각은 하나의 돌에서 인물을 캐내는 것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동 시대에 이런 인물 석조상이 제작된 예가 없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소중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이유다. 다만 상체의 역삼각형 체형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고, 복근 및 허벅지 앞 근육을 선으로 표현하는 점은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 ‘수니온의 쿠로스’는 당대 그리스 젊은이의 아름답고 균형 잡힌 육체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릎과 정강이의 뼈의 도드라진 표현과 근육의 역동적인 모습이 강인한 체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수니온 쿠로스’ 유형의 초기 쿠로스는 2~3 세대가 지나가면서 보다 유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발전한다. 대표적인 예가 ‘아나비소스(Anavysos) 쿠로스’이다. BC 540~515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쿠로스는 아테네 인근 아나비소스에서 발굴되었다. 그리스의 쿠로스 조각이 아테네를 수도(首都)로 한 아티카 지방에서 많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아테네가 그리스 예술 창작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아나비소스의 쿠로스’는 쿠로스 조각의 완숙미를 물씬 풍겨준다. 근본적으로 직립의 경직성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했지만, 해부학적 근육의 표현이 자연스러워졌고 보다 유연해졌다. 인체 구조에 대한 이해와 대리석을 다루는 조각가의 역량이 한층 높아진 게 두드러진다.
석조 작품으로 더 이상의 역동적인 모습을 연출하기 어려운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양팔을 몸체에서 자연스럽게 떨어뜨려 공간을 만들어냈지만, 석조의 취약성으로 인해 팔을 몸체에서 완전하게 떼 내거나 팔을 드는 등의 자세를 조각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조각가들의 열정적인 표현 욕구는 결국 석조의 한계를 넘어 청동 조각으로 진화하는 소재의 혁신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6세기 중반의 쿠로스 조각은 5세기 고전기의 탁월한 청동 조각 예술의 태동을 예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쿠로스 감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아나비소스의 쿠로스’와 동일 시대의 쿠로스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아르카이크 스마일(archaic smile)’이다. 입술에 머금은 오묘한 웃음은 삶의 여유와 소박한 행복, 내면에서 차오르는 절제된 기쁨을 담고 있는 듯하다.
우유 빛 대리석 석상에서 뿜어내는 살아있는 듯한 미소에 매료되어 필자는 한동안 이 쿠로스 앞을 떠나지 못했다. 이 쿠로스는 아티카 지방의 메렌다(Merenda)에서 발굴되었고, BC 540~530년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천 년 이상이 지나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의 불상에 등장하는 부처의 미소에 ‘아르카이크 스마일’이 스며든 건 아닐까? 굳이 어떻게 닮고 안 닮고를 따질 필요는 없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쁨의 감성이 꾸밈없이 표출된 모습은 똑같지 않을까? 다만 그리스인들이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갖고 이를 제대로 표현해냈을 뿐이다. 이런 미소를 머금은 인간 조각을 봉헌 받는 신의 입가에도 역시 이런 미소가 저절로 떠오르지 않았을까?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 앞에 서서 눈을 감고 250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도리아 식의 간결하고 장엄한 대리석 열주들, 포세이돈이 새겨진 화려한 박공의 부조, 신전 앞에 봉헌된 쿠로스 상과 청동 조각의 모습은 신성한 포세이돈의 권세와 영광을 한층 더 빛내었을 것이다. 도전의 길을 떠나기 앞서 신전을 찾는 아티카 사람들이 그곳에서 용기와 희망으로 새롭게 충전한 후 탁 트인 에게 해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과 아테나 신전은 BC 480년 3차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티카 전역을 점령한 페르시아 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 대군의 침공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전 시민들을 살라미스 섬으로 소개(疏開)시키고 전 국토를 그대로 페르시아 군에게 내주고 만다.
이 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이 불태워지고 파괴된다. 포세이돈 신전 안에 있었을 포세이돈 청동 상과 귀중한 봉헌물들이 모두 약탈당했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전이후 한 세대가 지나 탁월한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의 융성기를 이끌면서 비로소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이 4년간에 걸쳐 재건된다. 그 때가 BC 440년이다. 그 이후에도 포세이돈 신전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과 이후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참화를 피하지 못했다. 포세이돈 신전은 아테네의 영광과 수난의 역사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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