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술먹이는 '웃자는 건배사 죽자는 건배사'

이슬기 기자

입력 2014.02.01 10:04  수정 2014.02.01 10:11

새누리당 "대박"(대통령 박근혜) 민주당 "(조용히) 위하여"

관료들 "남행열차"(남보다 열심히 행동빨리 차기서도 살자)

정치인들은 어떤 ‘건배사’로 술맛을 돋울까.

송년회를 비롯한 각종 술자리 모임에서 정치인들이 나누는 건배사에는 당시 정치권의 주요 관심사와 공유하는 바 등이 담겨있다.

요즘 대세는 역시 첫 어절의 글자만을 모아 하나의 단어를 만드는 준말 건배사.

그 중에서도 ‘핫 아이템’을 만든 이는 정옥임 전 한나라당 의원이라 하겠다. 정 의원은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만찬에서 ‘마주 앉은 당신의 발전을 위하여’라는 뜻의 ‘마당발’을 선보여 큰 화제가 됐다.

마당발은 등장 이후 야당은 물론 각 보좌진 등이 속한 국회내 동창 모임으로 퍼져나갔고,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배사로 자리를 굳혔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공식 건배사’로 자리매김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특히 의원과 보좌진 등이 속한 국회 내 동창 모임에서는 옆에 앉은 이를 바라보며 ‘오징어’(오래도록 징하게 어울리자)나 ‘원더풀’(원하는 것보다 더 잘 풀리길)을 외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난해 12월, 새해를 앞두고 한 야당 의원이 기자들을 초청한 만찬자리에서는 ‘너나 잘해’라는 말이 재차 오고갔다. ‘너와 나의 잘 되는 새해를 위하여’라는 뜻으로, 의원을 비롯한 윗사람 얼굴을 보며 ‘당당히’ 외칠 수 있다는 이유로도 여러 번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여야 공히 소통을 강조하고 나서는 요즘, ‘통’(通, 통할 통)도 빠질 수 없다.

‘소화제’(소통과 화합이 제일), ‘진통제’(진정이 통하는 게 제일)에 이어 의사소통, 운수대통, 만사형통의 끝 어절만 모아 ‘통통통’을 외치며 술을 털어 넣기도 한다.

특히 새누리당에서는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사우나’(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중한 만남을 위하여) 등 보수정당답게 단결력과 끈끈함을 강조하는 건배사가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지난 2013년 1월 2일 당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와 진영 인수위 부위원장, 유준상 상임고문, 유일호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서울시당 위원장) 등이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서울시당에서 열린 ´서울시당 신년 인사회´에서 건배하고 있다. ⓒ데일리안

대선 따라 바뀌는 건배사

하지만 정치권 건배사의 생사를 좌우 하는 것은 역시나 대통령 선거.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겨울, 서울과 과천에 자리한 정부청사 주변 술자리에서는 ‘남행열차’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한국인의 변함없는 노래방 애창곡 ‘남행열차’가 아니다. ‘남보다 행동을 빨리·열심히 해서 차기정부에서 살아남자’는 뜻으로, 관료들의 우습고도 슬픈 바람이 서린 건배사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안심하며 ‘이명박’을 외치곤 한다. ‘이제는 명백히 박근혜 시대’의 준말이다. 연이어 여당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자신감이 묻어있어 새누리당 의원들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6일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한 후 ‘대박’은 그야말로 건배사 세계에서 ‘대박’이 됐다. 기자회견 다음날, 새누리당 의원과 당협위원장 전원이 참석한 청와대 만찬에서는 “통일 대박”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물론 ‘대박’은 여권에서 이미 익숙한 건배사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등 여권에서 승리를 기원하며 쓰이던 ‘대통령 박근혜’의 약칭이기 때문.

정권과 관련한 야당 건배사를 묻는 질문에 한 민주당 의원실의 보좌관은 “야당은 정권이 우울해서 그런지 건배사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술만 부어 넣지 뭐”라고 웃으며 말했다.

한편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는 뜻에서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은 ‘한잔하세, 그러세’라는 건배사를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칫 경직될 수 있는 모임에서 나이나 직급과 상관없이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것으로 지금도 애용되고 있다.

물론 ‘(선거)승리를 위하여’와 같은 고전적 구호도 여전하다. 한 야권 인사에 따르면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술자리마다 목소리를 중저음으로 낮춘 채 “민주당을 위하여”라고 엄숙하게 외치고는 한다.

6·4 지방선거가 5개월도 남지 않은 지금, 지선까지 ‘대박’을 기대하는 새누리당의 술잔, ‘민주당을 위하여’ 높이든 민주당의 술잔. 그리고 술을 즐기지 않아 건배사 할 일이 거의 없다는 안철수 의원의 조용한 술잔.

누구의 건배사가 6월의 포문을 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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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 기자 (wisdom@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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