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미도; 촬영지 계화도엔 봉수가 있다

최진연 유적전문기자

입력 2013.11.30 14:12  수정 2013.11.30 14:21
G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갯벌이 상전벽해된 사연 묵묵히 지켜봐

부안에서 서해방향 계화면으로 가다보면 광활한 농경지를 볼 수 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이 시작될 때 국내최대의 간척지 사업을 벌인 곳이다. 방조제가 완공되자 농경지가 조성되고 1978년부터 쌀이 생산되면서 ‘계화미‘ 란 브랜드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계화는 간척을 하기 전에는 작은 섬이었다. 바닷가에 둑을 쌓고 고인 물을 빼내자 곡창지대가 됐고, 바다가 육지로 바뀌면서 국토는 확장되고 새로운 관광지가 태어났다.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농촌은 소득이 늘어났고 주변의 도시도 경제가 살아났다. 1970년대 중순부터 1989년까지의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복원한 부안 계화리봉수 원경ⓒ최진연 기자

이런 계화도의 변천과정을 수 백 년동안 묵묵히 지켜본 봉수대가 있다. 이 봉수는 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봉화산(246m) 정상에 터를 잡고 있는데, 동진만을 거쳐 내륙으로 오고가던 선박들을 감시했던 중요한 군사요충지다.

계화산봉수의 초기설치는 고려시대다. 조선시대 때 전국의 다섯 횃불선 중 5노선의 직봉 연변봉수로서 남쪽 점방산봉수에서 봉화를 받아 북쪽 옥구 화산봉수로 전달했던 전라우수영 소속의 봉수였다. 즉 여수 돌산봉수에서 출발한 봉수가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이어져 충청도를 거쳐 서울의 목멱산봉수에 전달되는 거화선의 중간부분에 해당되는 곳이다.

마을사람들이 전하는 얘기는 인근에 있던 절의 주지가 개화기 때 봉수터에 암자를 지으면서 봉수대를 파괴시켰다고 했다. 원래의 봉수는 연대위에 둘레 약 6m 높이 3m의 횃불을 올리던 연조대가 있었다 한다. 현재 암자는 사라졌다.

마을에서는 6.25전쟁 전까지 매년 삼일절마다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으며, 가뭄이 심하면 봉화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갯벌에서 본 부안 계화리봉수 전경ⓒ최진연 기자

그 후 돌무더기만 남아 훼손방치된 것을 부안군에서 1995년 새롭게 복원했다. 하지만 복원과정에서 고증절차를 밟지 않고 마구잡이로 공사를 해 원래 모습을 망치고 말았다. 연대위로 올라가는 출입시설도 만들지 않았다. 올라가는 계단시설이 없어 꼭대기에 올라가 먼발치를 볼 수 없게 됐으니 봉수시설로는 무용지물이다.

봉수대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옛날 군사들이 돌무더기에 횃불을 피워 알렸제, 저그 변산에서 올라와 서울까지 갔다드만, 바닷가 높은 산이라 바람도 씨고 추웠을 건디 망보느라 얼매나 고상 했것어”라고 옛날을 회상했다. 산 아래 양지마을 사람들은 봉화산을 내집처럼 매일 오르내린다고 한다.

봉수에서 본 새만금 간척지ⓒ최진연 기자

다행히 연대 아래는 드넓은 평탄지가 조성돼 있어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남쪽은 간척사업으로 일궈놓은 광활한 들녘이 내려다보이며, 서쪽은 단군 이래 최대 건설사업인 새만금방조제가 끝없이 펼쳐진다. 공사기간 20여년에 6조원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다.

전설에는 계화도가 육지와 맞붙어 있었는데, 어느 날 큰 바닷물이 밀어닥쳐 삽시간에 계화산을 삼켜버리자 산이 반만 남아 섬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영화 ‘실미도’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계화도 가는 길은 부안에서 14번 도로를 따라 계화면 입구에 닿으면 허허벌판 끝머리에 봉긋 솟아있는 산이 봉화산이다. 계화리 양지마을 뒤편까지 자동차가 들어가며 이곳에서 도보로 30분이면 도착한다.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기사 모아 보기 >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