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울산 소산봉수' 지역 국회의원이 음택 조성
적의 침입시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호국유적인 봉수대에 호화판 묘지가 조성돼 문화재를 아끼는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서하리 봉화산(247m)정상에 조선시대 초에 축조한 소산봉수터에울산지역에서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권기술씨가 산을 매입한 후 자신의 부친 묘를 이곳에 안장했다. 그 후 2011년 본인도 타계하자 부친 아래 묻혔다. 묘지는 봉수 내부, 즉 유사시 봉홧불을 올리는 장소에 들어선 것이다.
봉수안의 위쪽이 부친 묘 아래는 국회의원의 묘지다 ⓒ 최진연 기자
이런 사실은 지금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근 기자가 현장취재로 밝혀졌다. 기자는 2000년도 초 중순경 두 번이나 현장을 취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봉수에는 초라한 민묘 1기만 있었다. 하지만 민묘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호화판으로 둔갑했다. 더구나 호젓했던 산길도 묘지를 조성하면서 자동차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산을 깎아 길을 냈다.
관할 면사무소 직원은 “호국의지의 표상인 봉수대에 지역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 왜 이곳에 묘를 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유적을 답사하는 또 다른 전문가는 “풍우와 엄동설한에도 목숨 걸고 이 땅을 지키려 했던 옛 군사들의 혼령이 분개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묘지가 조성되기 전의 모습 ⓒ 최진연 기자
울산지역은 해안을 끼고 있어 타 지역보다 봉수대가 많이 축조돼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8곳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유적의 상태가 양호한 것과 흔적만 남은 것까지 대부분 울산시에서 기념물로 지정하면서 유독 소산봉수만 문화재지정을 하지 않았다.
봉수가 있는 위치는 언양에서 경주방향 35번 국도를 따라 자동차로 약 10분 거리인
금화주유소와 두서면사무소 중간쯤인 자동차부품 생산업체인 비엔에프테크 뒷산이다.
이 공장을 끼고 300m 정도 들어가면 방말이란 마을이 나오는데 마을로 들어가기 전 왼편 산으로 난 차도를 따라 200m 올라가면 봉수대다.
전국의 봉수에는 민묘가 조성된 곳이 더러 있다. 사방을 조망할 수 있으며, 담장까지 둥글게 쌓여 풍수로서 그지없는 장소다. 조선말기 근대통신이 도입되면서 봉홧불이 멈춰버리자 이 터에 묘를 쓰면 후손이 잘 된다는 속설 때문에 즉 죽은 조상의 몸을 이용해 덕을 보겠다는 생각에서다.
상석에 국회위원 비문이 새겨져 있다 ⓒ 최진연 기자
우리나라 봉수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용됐으며, 고려 의종3년(1149)부터 국가에서 관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봉수제도는 조선 세종 때부터다. 봉수의 운영 목적은 국방상의 중요한 임무였다. 적의 침입을 알리고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자는 정부차원에서 시행한 제도였다.
봉수는 각 지역마다 약 10km의 거리에 망보기 좋은 산봉우리를 물색해 돌을 쌓아 올렸다. 연대로 부르는 이 석축의 높이는 약 7m 남짓했으며 둘레는 평균 20m 전후였다.
석축 주변은 목책 또는 돌로 담장(방호벽)을 쌓아 적의 침입 또는 짐승들의 접근을 막아 군사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인근의 주민 10여 명을 모집해 봉졸(烽卒)로 삼았다. 봉졸은 3인이 한 팀이 됐다. 그들은 병기를 휴대한 채 연대위에서 주야로 근무했으며 5일 만에 교대했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가까운 봉수로 급히 알리도록 한 것이 봉수제도의 시작이었다.
뒤에서 본 봉수대의 모습 ⓒ 최진연 기자
이후 세종은 봉화 운영상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보완했다. 봉졸인원 확대, 봉수를 4거에서 5거로, 전국의 봉수노선을 1로(路)에서 5로(路)로 확장했다. 조선시대 때 봉수대는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대략 전국에 643개소가 설치됐다.
우리의 봉수대는 지역마다 또는 산 지형에 따라 형태가 다르다. 울산의 소산봉수는 설계자체가 특이하다. 산잔등 경사지에 직사각의 방호벽을 둘렀는데 남쪽만 트여 있다. 둘레는 약 80m 정도에 높이는 1.3m, 폭이 1.6m다. 특이한 것은 방호벽 안쪽에 2단 석축이 방호벽과 나란히 이어졌다. 다른 봉수에 볼 수 없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방호벽 안쪽에 2단의 석축이 이어졌다 ⓒ 최진연 기자
봉홧불을 올리는 연조는 현재 묘지조성으로 인해 멸실됐다. 방호벽 뒤쪽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돌무더기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 봉수의 초기설치는 조선 초이며, 봉홧불이 가는 길은 제2노선 직봉의 내지봉수로서 남쪽 부로산봉수에서 불을 받아 북쪽 고의산봉수로 전달했다. 이곳에는 100여명의 군사 주둔했다.
최첨단의 무기가 범람하는 요즘시대에 봉수의 의미는 퇴락했지만 옛 군사들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슬기와 지혜는 보존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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