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소사이어티 칼럼>보수혁명의 생산-전파-실천 없이 한국의 미래 없다
1.들어가는 글
또다시 역사교과서가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현대사학회가 만들고 교학사가 펴내는 고교 한국사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을 통과하자, 좌파세력이 일제히 ‘뉴라이트교과서’라며 정치공세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인터넷 포털과 좌파매체들을 중심으로 이 교과서에 대한 비난이 번지더니, 급기야 제1야당인 민주당도 가세했다. 민주당은 연일 대변인 성명을 내고, 국회 대정부질의에서까지 문제 삼더니, 급기야 소속 의원들이 나서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이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교수들에 대한 자료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해당 교수들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고 약점을 잡아서 압박해 보겠다는 속셈이리라.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이 교과서의 내용이 아직 일반에 전혀 공개되지 않았음에도 이 난리가 났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좌파세력의 일사불란한 기동력과 전투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2004년 《월간조선》 3월호에 고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좌(左)편향성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가 사회적으로 반향을 얻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이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의견을 나누었던 김광동 나라정책원장이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에게 “고교 역사교과서의 좌편향성이 심각하다”고 얘기했고, 권 의원이 이를 국회에서 문제 삼은 것이다.
이후 《조선일보》 《동아일보》등이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이후 교과서의 좌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한 교과서포럼이 만들어지고, 이른바 ‘뉴라이트교과서’로 알려진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도 나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많이 늦어 있었다. 좌편향 교과서가 문제가 됐을 때에는 이미 이 교과서들이 5~6년 이상 유통된 다음이었다. 더욱이 386운동권세대에게는 이러한 역사인식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결국 지금은 교과서의 좌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이 ‘역사왜곡’으로 비난받는 황당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좌파는 해당 교과서 내용이 공개되기도 전에 선제적(先制的)으로 논란을 일으켜 ‘문제교과서’로 낙인찍어 버리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좌파 학자, 언론, 포털, 시민단체, 정치인들이 총동원되고 있다.
이런 대조적인 모습은 단순히 고교 역사교과서나, 역사학계나 지식인 사회의 이념구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이념전선(戰線)의 현실이고, ‘이념(가치)생태계’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정권은 2007년 이래 우파(?)가 잡고 있다. 하지만 ‘이념생태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좌파생태계는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는 반편, 우파생태계는 거의 마비 상태에 있다. 국정원 정치개입 논란이나 역사교과서문제 등에서 우파가 수세(守勢)에 처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에서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생태계란 ‘어느 환경 안에서 사는 생물군(群)과 그 생물들을 제어하는 제반 요인을 포함한 복합 체계’를 말한다. 이를 원용(援用)하면 ‘우리 사회의 이념과 그 이념을 제어하는 제반 요인을 포함한 복합 체계’를 ‘이념생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생태계에서는 이념(가치)가 생산, 전파(傳播)되고, 현실화되거나 사라진다.
이 글에서는 ‘이념생태계’의 의미를 이념(가치)의 생산, 전파, 현실화되는 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보상체제까지를 포함하는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념의 생산’이란 지식인, 대학, 싱크탱크 등을 통해서 이념이 만들어지는 것을, ‘이념의 전파’란 교육, 언론, 출판, 문화, 예술이나 시민단체의 활동을 통해 이러한 이념이 확산되는 것을 말한다.
‘이념의 현실화’는 정치적•정책적 의제가 되고, 더 나아가 그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보상’이란 그러한 과정에 종사한 사람들의 노력이 권력이나 명예, 금전 등의 형태로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한다.
2.문제의 근본 원인
우리나라 우파생태계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이념의 부재(不在)’다. 흔히 보수(保守)세력이니 우파세력이니 하지만, 그 개념부터 모호하다. 이 나라 우파가 지향하는 이념은 무엇인가? 보수주의인가, 자유주의인가? 대한민국에 보수할 만한 가치나 전통이 있는가? 서양사상사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한때 대립하는 가치였는데, 이러한 모순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극복되고 있는가?
‘이념’은 한 사회, 한 정치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푯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푯대가 불분명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보수’ 혹은 ‘우파’라는 것이(그게 이념이든 세력이든) 고유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좌우익 투쟁과 6•25전쟁, 경제개발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의 결집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보수’‘우파’는 ‘자체발광(自體發光)’이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상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반사체(反射體)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반공주의’는 상당 부분 6•25의 기억과 권위주의정권의 권력에 의해 유지됐다. 세대가 바뀌어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권위주의체제가 해체되면서 ‘반공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이념을 생산하는 일을 게을리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가 있다. 자유, 평등, 인권의 존중, 법치주의, 대의민주주의 등은 분명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다. 때문에 ‘우파’인사들 중에는 ‘헌법적 가치의 존중’을 강조하면서 ‘헌법수호세력’을 자처하는 이도 있다. 또 이러한 헌법적 가치와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애국세력’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근래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제고(提高)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처럼 ‘자유’에 대한 신념이 역사와 전통 속에 뿌리 내린 것이 아닌데다가, 자유보다는 평등, 개인보다는 집단과 국가에 무게중심을 두는 전통 때문에, 빈부격차나 글로벌금융위기를 ‘신(新)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는 프로파간다 때문에, 자유주의는 좀처럼 국민들 의식 속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 이룩한 정치•경제•사회적 성취들을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주의’, △자유와 창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립적 개인들의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 △개인과 공동체, 자유와 평등, 책임과 의무 등이 균형점을 이루는 ‘공화주의’, 그리고 △혈연 문화 운명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중심에 놓는 낡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와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긍지를 중심에 놓는 ‘헌법애국주의’의 결합체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이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걸 어떻게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한 마디 말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질 수 있게 정치(精緻)하게 다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문제는 이러한 작업을 하는 지식인도, 싱크탱크도 없다는 점이다. 있다면 언론인 조갑제씨나 일부 뉴라이트지식인들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노력해 온 것 정도다.
반면에 좌파세력에게는 그들이 지향해야 할 명확한 푯대로서의 이념이 있다. 그게 소련-동구의 붕괴로 빛이 바랜 마르크스-레닌주의이건, 3대세습과 기아와 인권유린으로 전 세계의 조롱을 받는 김씨조선을 옹호하는 ‘주체사상’이건 간에 말이다. 그리고 이 ‘이념’은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있다.
3.이념 없는 운동의 한계
1) 자유주의, 보수주의는 팔기 어려운 상품
이념이 없다는 것은, 대중 앞에, 다음 세대 앞에 내다 놓을 ‘상품’이 없다는 얘기다. 내다놓을 ‘이념’은 없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인간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이념의 시대는 갔다”느니,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냐”하는 소리가 그것이다.
그들은 그런 소리를 하면서 ‘나는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난 쿨(cool)한 인간’이라고 자위할 지도 모르겠다. 웃기는 얘기다. 이념은 가치관이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듯, 한 공동체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지향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공통의 합의를 가져야 한다.
그게 이념이다. 이념이 없다는 것, 이념을 넘나드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인간은, 그가 자연인이든,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나는 삶의 푯대가 없는 인간,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같은 낡은 사상이건, 주체사상 같은 옴진리교 수준의 사이비 사상이건, 내다 팔 이념이 있으면, 그걸 취급하는 유통망이 형성될 수 있다. 전교조는 학교에서, 좌파 교수들은 대학에서 이를 가르칠 수 있다. 이에 기초해서 세상이나 역사를 보거나 고전을 재해석하는 책들을 낼 수도 있다.
그러한 이념을 담은 음악이나 미술 작품,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념에 기초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민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파는 그게 잘 안 된다. 이념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걸 시쳇말로 섹시하게 가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보수주의도 그렇고 자유주의도 그렇다.
둘 다 사회주의처럼 인류가 나아갈 청사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이념이 아니라, 인간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삶의 철학’이다. 자극적이거나 쿨 하지 못하다. 한 마디로 가슴에 와서 박히는 사상이 아니라, 삶의 체험과 성찰을 요구하는 사상이다. 잘 팔리기가 어렵다. 애초부터 철학적 전통이 박약한데다가, 갈수록 경박해지는 한국에서는 더 그렇다.
2) ‘이념’ 중심의 운동, ‘사람’중심의 운동
이념의 부재는 운동 현장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이념이 중심이 된 운동은 지속가능하다. 그 운동을 하던 사람이 감옥에 가거나 죽어도 이념은 남는다. 그 이념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운동을 하고, 지지자를 확산시킨다. 때로는 이념의 해석이나 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분열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언제고 다시 연대(連帶)할 수 있다.반면에 이념이 없는 우리나라 우파의 경우 ‘사람’ 중심의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북한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사람,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싫은 사람, 북한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 대한민국 현대사의 성취를 긍정하는 사람, 포퓰리즘에 반대하는 사람, 시장에 대한 정부나 노조의 간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뭉친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공적(公敵)’이 있으면 더 뭉치기 좋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공적’이 사라지면 운동은 동력을 잃는다. 또 하나, ‘사람’이 중심이 되다 보니, ‘사람’간의 관계 때문에 운동이 망가진다. 운동을 위해 더 나은 이념과 전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에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 가방끈이 조금이라도 더 긴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행세한다.
그러다가 “저 치가 나보다 잘난 게 뭐 있다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운동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운동의 방향을 놓고 다투다가 틀어지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혹은 생기는 것도 없는 자리 때문에, 혹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사생결단할 것처럼 싸운다. 이게 다 따지고 보면 ‘이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념’은 개인 간의 갈등을 강제로라도 억누른다. ‘이념’이 없는 사람 중심의 운동에서는 그게 안 된다.
3) 후계세대를 못 키운다
우파운동이 이념이 아닌 사람 중심의 운동으로 흐르다 보니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점은 젊은 후계세대를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력적인 운동이념이 없으니 젊은 세대가 찾아들지를 않는다. 사람 중심으로 운동이 이루어지다 보니 나이든 기성세대가 자리와 역할을 차지하고, 젊은이가 오더라도 이를 키워줄 생각을 안 한다.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는 김대중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항의하는 우파단체들의 시위에 참여한 일이 있다. 신 대표는 당시 인기 있던 영화 '친구'의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 해서 ‘언론이 정권의 시다바리가?’라는 구호판을 만들었다가 ‘어른’들로부터 “장난하느냐?”고 야단을 맞았다. 이런 분위기가 젊은이들이 우파운동에 투신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일부 시민단체나 기관을 중심으로 우파운동에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관된 교육체제나 사후관리가 없었다. 대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대기업 입사시 인센티브를 준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는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운 학생들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일부 기성세대 운동가들은 “우리 단체에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젊은 보수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몇 안 되는 젊은 보수운동가들을 끌어당기는 경쟁을 벌이면서 젊은이들을 버려 놓기도 했다.
4) 호텔 레스토랑 패트리어트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꼭 이념지향적인 단체는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모임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조찬강연이나 세미나를 많이 열었다. 대개의 경우 초청 연사도 ‘원로’였고, 참석자들도 ‘원로’였다.
강연하시는 분도 옳은 소리를 했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호응하는 분들도 옳은 소리를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이런 자리에 나온 분들이 우파 싱크탱크나 시민단체를 만들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는 얘기를 나는 못들었다.
국가보안법 사수나 북한인권을 위해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시위에서 이들을 만난 기억도 없다. 이들을 나는’Hotel Restaurant Patriot’라고 부른다. 김기진(金基鎭)의 시(詩) ‘백수(白手)의 탄식’에 나오는 ‘Cafe Chair Revolutionist’라는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도 ‘이념’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념’이 없으니 ‘행동’도, 위험을 감수할 의지도 뒤따르지 않는 것이다.
5) ‘우리 편’을 챙기지 않는다
칼 슈미트는 ‘정치는 적(敵)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했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념이다. 삶의 푯대를 같이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적과 동지가 구분된다. 이념이라는 기준이 없는 곳에서 적과 동지의 구별기준이 되는 것이 이해관계다. ‘이념’이라는 푯대가 확실한 좌파에게는 적과 동지의 구별 또한 확실하다.
그들은 이념을 같이하는 자기편들로 ‘떼’를 이루어, 적을 확실하게 ‘다구리’놓는다. 대신 자기편은 확실하게 챙겨준다.‘이념’이라는 푯대가 없는 우파는 그 반대다.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해 헤맨다. 아는 사람 눈에는 ‘적’이 분명한 사람인데도, 데려다 쓴다. 반면에 ‘내 편’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의식도 없다.
이명박 정권 초기, 친노(親盧)좌파 연예인들의 정리 문제가 논란이 될 때의 일이다. 나는 우파단체가 주관한 세미나에 토론자로 나가서 탤런트 안내상 씨의 운동권 전력(前歷)을 언급한 적이 있다. 바로 그날 《오마이뉴스》는 대문짝만하게 ‘우파의 다음 목표는 안내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물론 안내상 씨에 대한 우파 차원의 조직적인 공세가 있었던 것도, 이후 안내상 씨에게 무슨 불이익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 편’을 지키겠다고 ‘오버 액션’하는 좌파의 전우애(?)와 신속한 대응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우파’는 그걸 못한다. 개그맨 심현섭 씨는 ‘사바나의 추장’으로 인기절정에 있다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는 바람에 소리 소문 없이 연예계에서 사라졌다. 그때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김대중 정권은 2892명, 노무현 정권은 646명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을 사면, 복권해 주었다. 이들 중에는 단순한 시국사범이 아니라, 명백한 간첩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에 이명박 정권은 어떠했는가?
노무현 정권 시절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집회를 열었다가 노 정권의 검찰에 의해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서정갑, 신혜식, 최인식씨 등에 대한 재판이 이명박 정권 아래서도 계속 진행됐고,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우파인사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이들에 대한 기소중지, 사면복권을 건의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들의 건의에 귀를 기울였지만, 번번이 실무진에서 ‘좌파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딴지를 걸었다. 2007년 대선 국면에서 좌파세력을 비판하는 광고를 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임헌조씨도 이명박 정권 내내 사면 복권을 받지 못했다.
이들 중 서정갑, 임헌조 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기만료 직전 단행한 특별사면에서 간신히 구제받았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좌파적’발언을 하는 연예인은 ‘개념연예인’이 된다. 하지만 ‘민주화’라는 말을 일베식 용법으로 쓴 아이돌이나, ‘종북퇴출’을 주장한 방송인 정미홍 씨 등은 온갖 욕을 먹고 왕따 당한다.
이념으로 뭉친 좌파는 내 편과의 공조(共助)도 잘한다. 걸핏하면 공대위(共對委) 간판을 앞세워 뭉친다. 전교조, 민노총, 환경연합, 민변, 민교협, 여연, 생활협동조합 할 것 없이, 국가보안법 폐지, 광우병, 대운하반대, 키리졸브훈련반대, 한미FTA반대 할 것 없이 건수만 생기면 하나가 되어 나온다. 우파운동에는 그게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다.
6) 보상체계의 결여
‘내 편 챙기기’는 운동에 헌신적으로 투신한 사람에게 다양한 형태의 보상을 해 주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25명, 민주당은 21명, 통합진보당은 6명, 자유선진당은 2명의 비례대표(전국구)의원을 배출했다.
그런데 새누리당과 민주당-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의원들의 명단을 보면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들을 보자. 여성 과학자, 여성CEO, 장애인단체 대표,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 영화를 통해 뜬 이주여성, 메이저언론 논설위원, 대학교수, 국책연구기관 연구원…, 나름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인사들이지만, 이들을 일관하는 이념적 정체성(正體性)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각 분야에서 잘 나간다는 사람들, 유권자들의 눈길을 끌만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불러 모은 느낌이다. 새누리당이 이들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들을 앞세워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민주당이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의원들은 이념적 정체성이 분명히 느껴진다. 민주당의 경우, 전태일의 여동생을 시작으로 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 민변 여성인권위 위원장, ‘정수장학회’논란의 한 축인 《부산일보》 퇴직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민족문제연구소 전남사무국장,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 금융노조 위원장,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전교조 출신 민중시인,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 출신 전 방송위 부위원장 등으로 이어지다가, 1989년 밀입북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임수경으로 끝을 맺는다. 하나하나가 이념투쟁의 최선봉에서 싸워온 ‘투사들’이다. 통합진보당의 경우는 민주당보다 더 이념적 색채가 강렬하게 드러난다.
민주당의 비례대표 명단을 보면, 오랫동안 이념투쟁에 종사해 온 이들에 대한 일종의 보상체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최민희 의원의 경우, 좌파매체인 《말》지 기자로 시작해, 1990년대 중반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국장을 지냈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방송위원회 부위원장과 위원장 직무대행을 지냈다. 이후 ‘국민의 명령’‘혁신과 통합’에서 야권통합운동을 하다가 이번에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김기식 의원은 참여연대 활동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이다. 1994년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한 이래 참여연대 사무국장, 정책실장, 사무처장, 정책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는 참여연대 외에도정치개혁시민연대 운영위원장, 파병반대국민행동 집행위원장, 탄핵반대부패정치청산범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 2004총선시민연대 공동집행위원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6•25 영웅 백선엽 장군을 ‘민족반역자’라고 했던 김광진 의원의 경우, 32세에 불과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전남사무국장을 지낸 ‘투사’다. 반면에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들 중에는 그런 투사가 없다. 보상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는 ‘캠프’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보상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 들어와서는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그것도 없어졌다.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영혼 없는’ 관료들이다.
권력이나 관직으로 이렇게 보상이 어려운 경우에는 다른 방식으로 보상할 수도 있다. 과거 좌파정권 시절,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은 나랏돈으로 ‘우리 편’을 챙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식의 보상은 뿌리가 깊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귀족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애국자(혁명파)들을 돕는 ‘애국자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사회적 기업에 대한 지원이나, 최근 서울시가 적극 추진하고 있는 마을공동체나 협동조합에 대한 지원도 변형된 형태의 좌파에 대한 보상 내지 ‘자기편 챙기기’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과거 PD운동권 출신 저술가 박성현씨 등은 오늘날의 좌파, 특히 종북좌파세력을 ‘생활공동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권력도, 돈도 안 되면, 타이틀이라도 그럴 듯해야 한다. 좌파운동권에서는 나이가 어려도 그럴듯한 타이틀을 달아준다. ‘노인’들이 많고, 젊은이들을 키워주지 않는 우파운동권에서는 그것도 안 된다. 운동하다가 뜻이 안 맞는 사람들, 타이틀이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간판을 내걸고 자기도 ‘대표’가 된다.
하지만 이념이나, 그 이념에 공명하는 운동가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1인 조직’이 되기 싶다. 이는 ‘분열’일 뿐이다. 이는 우파 인프라의 약화로 이어진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원사건은 어떻게 보면, 우파 인프라가 취약한 상태에서 공권력의 힘으로 이를 보완하려다가 발생한 사고로 볼 수 있다.
4.대안과 전망
최근의 긍정적 움직임, 그렇다고 우파운동의 현실과 전망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직은 맹아(萌芽) 수준이지만, 긍정적인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이는 주로 북한인권운동과 자유주의운동 쪽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비교적 지속적인 운동이 계속되고 있고, 젊은이들도 유입되고 있다.
3년 전 주한캐나다대사관저에서 윤현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의 디펜베이커인권상 수상 축하 리셉션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북한인권운동을 하는 대학생들도 여러 명 참석했다. 그들에게 북한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았다. 이유는 ‘교수’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춘근 박사에게 배운 이화여대생, 홍규덕 교수에게 배운 숙명여대생들이었는데, 두 분 다 ‘현실주의국제정치학’의 관점을 중시하는 분들이었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다 보니 체제의 중요성,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그 결과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대답이었다.
이 때 ‘교육’을 포함하는 ‘이념의 전파’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연구하는 경제진화연구회도 주목할 만한 단체다. 회장은 50대 후반의 김정호 연세대 특임교수지만, 부회장들은 20~30대 젊은이들이다. 매달 여는 세미나를 비롯한 각종 행사의 기획, 진행을 이들이 맡는다.
처음에는 서툴러 보이더니, 갈수록 자리가 잡혀가는 것이 보인다. ‘젊은이들이 못 미더워서’ 70,80대 노인들이 움직이고 있는 다른 우파 조직들보다 훨씬 건강해 보인다.
시민주주(株主)들이 만드는 자유주의 싱크탱크 (주)프리덤팩토리는 3주 만에 600명이 참여의사를 밝혔고, 이 중 320명이 이미 1억2600만원의 주금(株金)을 납입했다. 영화 “NLL연평해전‘이 제작비가 모자라 제작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성금이 밀려들고 비용 마련을 위한 바자회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념과 동기, 열정과 비전을 갖춘 운동가들이 있으면 자생력 있는 우파운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바탕으로 우파도 일종의 우파생태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자기가 가진 능력을 가지고 우파운동에 헌신하고, 헌신한 사람에게 상응하는 보상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대부(代父) 윌리엄 버클리는 《내셔널리뷰》를 통해 보수이념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보수주의학생운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보수주의 학생운동가가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 언론, 정부, 의회 등으로 진출하는 것을 지원했다.
우리도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파대학생운동가가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비서관, 보좌관이 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 당적을 가진 자들이 한나라당 의원 보좌관을 했던 코미디 같은 일은 종칠 때가 됐다. 이념의 생산기지인 대학으로도 우파지식인들을 들여보내야 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1945~1969년 뉴욕대학의 초빙교수로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볼커 기금(William Volker Fund)’덕분이었다.
미제스는 뉴욕대학이 아니라 이 기금으로부터 급여를 받았다. ‘가진 자’들이 이런 식의 기금을 만들고, 대기업이 재단으로 있는 대학들이 자리를 만들어, 낭인(浪人)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이나, 과거 운동권이었다가 전향해서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올바른 역사인식이나 세계관을 심어주려는 지식인들이 강단에 설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어떨까?
이들에게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이춘근 박사나 홍규덕 교수에게 배운 학생들이 북한인권운동에 뛰어든 것처럼, 우리 사회를 위해 긍정적인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진 자’들이 우파싱크탱크 설립에 적극 나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애국이나 사상운동은 조건 없는 자기희생이라고 말하지 말자.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그런 조건 없는 자기희생은 없다. 우파운동도 마찬가지다. 이념의 생산-전파-현실화 과정을 정교하게 다듬고, 이 과정에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파생태계’다. 이러한 ‘우파생태계’의 건설 없이는, 지속가능한 우파운동도, 자유와 번영의 지속도 불가능하며, 사회통합은 더더욱 힘들 것이다.
글/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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