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도 혼자...' 술독 빠진 기러기 아빠들

김해원 기자

입력 2013.02.09 09:55  수정

유류 할증에 연휴 짧아 "비행기값이면 학비 보태자" 외로운 명절

우울증 3명중 1명…전문가들 "기러기 아빠들끼리 만나 고민 나눠야"

빚까지 내가며 자녀를 유학시키는 가정이 늘어나는 가운데 빠듯한 월급으로 생활비를 송금하는 기러기 아빠들의 명절 외로움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자녀와 아내를 해외로 유학 보내고 한국에서 홀로 직장생활을 하며 해외로 유학비를 송금하는 기러기 아빠들은 가족단위로 움직이는 명절이나 연말 등 축제 분위기로 들떠있을 때 특히 가족 생각이 절실하다.

이들은 이번 설이 짧은 연휴기간인데다, 불경기와 높아진 유류할증료까지 겹쳐 가족들이 있는 해외로 나갈 비행기 티켓을 끊으러 가는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아버지들이 항공료를 한 푼이라도 더 아껴 생활비로 송금하겠다며 외로운 설을 자처하는 것이다.

항공료 아낀 돈 가족에게 보내려는 기러기 아빠들

설을 앞두고 만난 기러기 아빠 2명은 이제 막 홀로 생활을 시작한 '신입 기러기'와 가족들은 해외로 보낸지 8년이 된 '고참 기러다'였다.

이들은 모두 2월 유류할증료가 한 단계 상승해 같은 곳의 비행기 티켓을 끊더라도 전 달보다 최대 22달러를 더 내고 가야 한다. 아울러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서 항공여행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터라 이들은 '나홀로 명절'을 선택했다.

8년 전 가족들을 뉴질랜드에 보낸 윤모 씨(42)는 시작한 사업이 호황을 누릴 당시 아이들과 아내를 뉴질랜드로 유학을 보냈지만 점점 기러기 생활이 힘겨워진다고 토로했다.

그는 "작게 시작한 치킨집이 잘 돼 몇 년간 호황을 누리다 최근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치킨집 경쟁에 생활비를 보내기도 빠듯한 상황이 됐다"며 "처음에는 여유있게 뉴질랜드를 오갔지만 점점 왕래가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윤씨는 “처음에는 자녀가 조금 크면 아내가 돌아와 같이 생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게 됐다”며 “아이가 커갈수록 학비 부담이 커져 최근에는 대출까지 받아서 생활비를 송금했다. 아내는 아직 사정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명절 때면 복작 거리는 가정이 부럽다”고 씁쓸해 했다.

이제 막 기러기 생활을 시작한 김모 씨(56·남)는 서민층 가정에 파고든 자녀유학 열풍에 대해 “어릴 때 못 배운 게 한이 되는 아버지들은 자녀가 더 많이 공부하기를 바란다”며 “수입의 절반이 넘는 돈을 유학비로 송금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축을 따로 하지 않아도 아들이 나중에 잘 되면 그게 저축”라고 덧붙였다.

강원도 철원 산명호 근처에서 포착된 큰기러기들.

우울증...영양 불균형...몸도 마음도 아프다

이들은 모두 명절이나 연휴가 되면 아내와 자식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고 입을 모았다. 일상생활에서도 가벼운 우울증 증상도 보인다고 호소했다.

최근 진행된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실제 대부분의 기러기 아빠들은 영양 불균형과 가벼운 우울증 증상을 앓고 있었었다.

이화여대 간호학과 차은정 씨는 ‘기러기 아빠의 건강 관련 삶의 질 예측모형 구축’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홀로 생활하는 35~59세 기혼남성 15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조사대상자의 76.8%가 영양불균형 상태로 나타났다. 또한 영양상태가 '매우 양호'한 것으로 조사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조사 대상자 중에는 월수입 600만원 이상 고소득자가 53%에 달했지만, 수입에 관계없이 홀로 사는 남성이 스스로 영양상태를 챙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도 3명 중 1명꼴(29.8%)로 나타났다. 이를 반영하듯 잊을만하면 기러기 생활을 하던 가장이 우울증으로 사망하거나 고독사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감정 표현에 서툰 40,50대 가장들은 외로움을 해소할 길이 없어 외로움을 술로 달래는 경우가 많다. 일부러 술자리를 만들어 홀로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하는 것.

"혼자 있는 시간 술에 의지 말고 같은 고민 가진 사람들 만나야"

한국 건강가정진흥원 고선주 원장은 "여자들은 혼자만의 시간이 있을 때 자기관리나 여행 등 알차게 보내는 경향이 있지만 남자들은 혼자있는 시간을 어색해한다. 주변사람들과 술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기러기 아빠들의 우울증 문제가 심각해지자 기러기 생활을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도 늘고 있다. 온라인 카페 등을 통해 같이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공통적인 어려움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 원장은 “아이들을 유학보낼 때 대부분 '아이들이 어떻게 적응을 할까', '어떻게 돈을 벌어서 뒷바라지를 할까'만 생각을 한다"며 "이런 고민도 중요하지만 한국에 남아있는 아버지가 어떻게 혼자 지낼지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행기 값을 아껴 자녀에게 무엇을 하나 더 해주는 것보다는 아버지와 실제 접촉을 해서 보내는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훨씬 소중하다"며 "부득이하게 자녀를 만나지 못하는 아버지라면 화상채팅을 통해 덕담을 나누고 절을 하고 세뱃돈을 주는 등 소소한 이벤트로 명절 분위기를 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자녀교육이 중시되는 상황에서 내밀려 있는 기러기 아빠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기러기 아빠들의 건강한 자립을 위해 사회적인 교육과 소통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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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원 기자 (lemir0505@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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