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 스트레스 없는 세상을 위하여 건배!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입력 2012.12.24 12:03  수정 2013.05.22 14:45

<김헌식 칼럼>강박의 건배사보단 진심의 스토리가 있는 건배사로

ⓒ데일리안
건배(乾杯)는 영어로 ‘토스트’(toast)다. 토스트는 말 그대로 구운 빵이다. 어떻게 구운 빵이 건배를 의미하게 되었을까? 아주 옛날 유럽에서는 포도주의 맛을 좋게 하려고 구운 빵을 한 조각 잔 안에 넣었다고 한다. 건배는 잔을 부딪치는 걸 말하는데 이때 술은 맛도 그렇지만 풍미가 좋아야 한다. 잔을 부딪치는 것은 서로간의 화합과 우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술이 잔에서 흔들릴 때 풍미는 더욱 널리 퍼진다. 건배는 현재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미래의 소망과 꿈을 향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의 꿈과 소망을 담은 말을 곁들이기 쉽다. 이것이 건배사가 된다. 고대 제사장은 하늘을 향해 잔을 들어 간절한 바람을 신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제 사람들 사이의 건배도 그러한 간절한 바람이 있을수록 그 자리가 빛난다.

대체적으로 각 나라에서 내려오는 건배사는 간단하고 함축적이다. 영·미 사람들은 ‘Good health!’(건강을 위해), ‘Cheer up!’(기분 내자)이라고 하고 프랑스인들의 ‘아보트르 상테!’(A Votre Sante·당신 건강을 위해)을 많이 쓴다. 이탈리아인들은 ‘알라 살루테!’(Alla Salute), 스페인들은 ‘살루드 아모르 이페세스타스!’(Salud Amor Ypesestas·당신의 건강과 사랑과 돈을 위해)라고 제법 길게 하며 북유럽인들은 ‘스콜(건강)!’이라고 짧게 말한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은 건배사가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술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술자리의 건배사는 남성위주의 성적 코드로 채워지기도 했는데 이제 그런 건배사 문화는 인터넷 디지털 환경에서 뭇매 맞기 일쑤다.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의 ‘오바마’(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가 대표적이었다. 이를 ‘오직,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길’이라고 풀었다면 같이 있던 여성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잔을 들고 하나, 둘, 셋 하면 진달래라 외쳐 주세요!” 라고 운을 던지고, 누가 물어도 대답 안하다가 꼭 여직원이 뭔데요? 라고 물으면 “진짜로 달래면 줄래?”라고 답변을 유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술자리 건배는 남성만의 전유물도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좌지우지 하는 상황도 아니며 이제 모두 즐기는, 공감적인 문화적 측면의 건배사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건배사는 세상에서 가장 짧고 열정의 폭발력을 말이다. 건배사는 좌중을 휘어잡고 포복절도하도록 분위기를 한껏 돋우며 모임의 참석자들을 순식간에 하나로 묶어주고 감정의 융화를 이끌어내는 촉매제다. 일상의 고단함을 털어내고 희망을 고양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연말 송년회가 다가오면 재밌거나 눈길을 끌만한 건배사를 두세 개는 준비해야할 참이다. 건배사를 모아 직원들에게 나누어주는 회시가 있는가하면 그런 책들이 발간되어 팔리기도 한다. 스마트폰시대에 맞게 관련 각종 어플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칫 건배사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구성원들에게 스트레스와 강박심리를 강화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건배사는 ‘~위하여’였다. 하지만 이 ‘~위하여’는 군사독재 문화의 잔재라는 지적이 많다.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군국주의의 소산이라는 주장도 있다. 위하여가 약간 진화해 첫 글자를 딴 건배사가 유행했다.

‘나가자(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위하여)’,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가 그렇다. ‘위하여’라는 단어를 빼고 삼행시 방식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사우나!(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오징어(오래오래 징그럽게 어울리자)’, ‘해당화(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가 그 예다. 유희적인 차원에서 의성어·의태어 건배사나 같은 음절이 반복되는 건배사에는 ‘껄껄껄’(좀 더 사랑할 껄, 좀 더 즐길 껄, 좀 더 베풀 껄), ‘싱글벙글(골프는 싱글, 사랑은 벙글)’등이 있다.

우리는 흔히 상황별로 건배사를 준비해야 한다. 예컨대 부부동반에는 여보당신(여유롭고 보람차고 당당하고 신나게), 회식에서는 소화제(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 골프장에서는 올버디(올해도 버팀목이 되고 디딤돌이 되자)가 있다. 언제나 타이밍도 중요한데 신년에는 ‘스마일(스쳐도 웃고 마주쳐도 웃고 일부러 웃자)’, ‘끝날 때는 변사또(변함없는 사랑으로 또만나자)’를 할 수 있다. 장소를 적절하게 찾아들면 건배사는 자신을 어필할뿐만 아니라 조직과 공동체를 더욱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목적에 따라 친목형 건배사가 있는데 ‘우리가 남인가’(선창), ‘아니다’(화답)라거나 선창자가 술잔을 들며 ‘그럼 이게 술인가?’라고 외치면 ‘아니다!’ ‘그럼 뭔가’ ‘정이다’(건배사)라고 한다. 알려진 시 구절을 빌리거나 고치는 방식도 있다. 대개 품격 있는 자리에서 시를 활용한다. 가령 매체에 오르내리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랑이여 건배하자. 추락하는 모든 것들과 꽃피는 모든 것들을 위해 건배’ 올 한해 추락한 것들과 꽃이 핀 모든 것들을 위해 우리 건배합시다. 사랑이여 건배!”

해마다 직장인들의 애환이 담긴 건배사는 영원하다. ‘명품백’은 ‘명퇴조심, 품위유지, 백수방지’, ‘노총각(노하지 말고 총대 메지 말고 각 세우지 말고)’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여성용 건배사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119(1차만 1가지 술로 9시까지)’, ‘탱탱탱(탱탱한 피부와 탱탱한 삶과 탱탱한 내일을 위하여)’, ‘남존여비(남자의 존재 이유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다)’등이다.

대중문화 속 특히 영화의 명장면은 건배사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애니메이션 <라이언킹>에서 사용되면서 건배사로 쓰인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는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주인공 커팅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자주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기자)도 자주 건배사로 활용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영화 '카사블랑카'의 건배사였다. 이 영화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먼과 잔을 부딪치며 속삭인 명대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연인을 앞에 반복했다.

광고에서도 건배사는 인상적으로 사용된다. ‘미친 자들에게 건배를’은 미친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의 1997년 애플 광고 카피이다. 스티브 잡스의 명성에 힘입어 건배사로 선호되었다. 술 광고처럼 단순히 술 소비를 증대하기 위한 건배사보다는 훨씬 나았다. 우리가 지향해야할 삶의 사회적 가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바람에 쓴 편지'(Written On The Wind, 1956)에서 카일이 "자, 아름다움과 결코 아름답지 못한 진실을 위하여, 건배!"라고 하거나 영화 '야수의 날'(El Dia De La Bestia, 1995)에서처럼 “언제나 세상을 구했던 건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영웅들, 그들을 위하여 건배!”라고 하는 것처럼 건배사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도 좋다.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미래를 묶을 수 있는 건배사도 중요하다. ‘통통통’(通通通)은 ‘통∼의사소통! 통∼만사형통! 통∼운수대통! 통통통’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의사소통만 잘 되면 만사가 술술 풀리고 운수가 절로 터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언제부턴가 소통 부재가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부터 생겨난 현상을 담고 있다.

영화 '사일런트 웨딩'에서처럼 모임회식에서 건배사 릴레이를 시도해도 좋다. ‘행운이 가득하길’이라는 건배사가 한 사람 한사람의 귓속말을 거쳐 ‘당신의 허연 가슴이 내손에 가득하길’ ‘진짜로 애 봐주는 사위가 되길’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이가 되길’로 바뀌어가는 장면에선 웃음보가 터진다. 일종의 유쾌한 건배사 게임이다.

무엇보다 단순히 ‘구호형’의 건배사 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건배사가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는 것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건배사의 강박심리다. 웃기거나 감동을 주어야 한다며 만들어진 건배사보다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경험담과 스토리에 바탕을 둔 건배사가 더 중요하다. 강박의 건배사를 기피하는 일들이 많아지면 조직의 융화는 저해될 것이니 말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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