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지표조사 후 6년간 그대로 방치
"70년대 초에 성돌을 빼다가 계곡 아래 절을 지었습니다. 당시에는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이라 돌을 굴리면 산 아래까지 바로 내려갑니다. 현재 절은 주인이 없어 빈집으로 남았습니다."
우리나라 산성과 읍성의 석축은 일제 때부터 수난을 당했다. 산성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성돌을 빼다가 자기 집 담장 또는 축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터가 있는 마을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완벽한 서남쪽 성벽
지난 12월 하순, 경기도 가평군 하면의 현리산성을 가평군청 문화관광과 박영화 계장(55), 현5리 신제영 이장(49)과 함께 동행했다. 신 이장은 산성아래서 13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며, 어릴적부터 내 집같이 오르던 산성이다.
산성은 좁은 등산로를 따라 3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다. 서남쪽 가파른 산등성이에서 만난 성벽은 고색 짙었지만, 잡목이 석축을 가로막고 있었다. 일행은 잡목을 제거하는데 30분을 소비했다. 그냥두면 성벽이 나무뿌리에 밀려나 붕괴되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성벽길이는 20m에 높이가 3m 정도다. 성벽은 물림 쌓기를 했고, 중간에는 언제 누가 다시 쌓았는지 알 수 없지만 층이 맞지 않은 엉성한 성벽을 볼 수 있다. 성벽이 끊어진 구간은 경사지여서 석축이 자연 붕괴된 것 같았다. 성벽 3m 앞쪽에는 다듬질 한 보축성벽이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길이는 약 5m에 층은 4단으로 남아있다. 현리산성에서 성벽이 가장 잘 보존 된 곳은 서남쪽이다. 바깥만 돌로 쌓고 상부는 돌과 흙을 혼합해 양쪽을 쌓아올렸다. 상부 폭은 3m 정도다.
현리산성에서 출토된 토제마
서벽을 타고 오르자 돌과 흙이 혼합된 성벽은 흙더미 속에 묻혀있지만 온전하게 이어졌다. 성벽이 끊어질듯 움푹 파인 곳에서는 문지의 흔적도 보인다. 문지안쪽에는 석축이 너부러져 있고 펀펀한 바닥을 볼 때 건물자리 같았다. 건물지 위에는 작은 집채만한 둥그스레한 바위가 있고, 바위 앞에는 “이북망향제단비“ 라고 쓴 비석이 있는데, 이 비는 6.25 전쟁 때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현리에 모여 살면서 고향을 그리며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석을 세우기 이전에도 이곳에는 제단터가 있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북쪽의 성벽도 잡풀 속에 묻혔지만 성의 흔적은 또렸했다. 동쪽으로 급하게 굽어지는 곳에서 또 하나의 문지흔적이 보인다.
정상에 오르자 사방이 뚫렸고 너른 평지가 단을 이루며 펼쳐진다. 북쪽으로 운악산, 동쪽에서 남쪽까지는 명성산 등줄기가 길게 늘어졌다.
남벽 원형의 석축과 후대 석축
"전망이 좋아 그런지 옛날 이곳에 봉화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70년대 이 자리에 군인들이 대공포를 설치하면서 유적이 훼손됐어요. 한 20년 넘게 군인들이 주둔하다가 2000년도엔가 철수 했습니다."
마을이장은 70년대 정상부근에 성돌이 있었다고 했다. 현재도 곳곳에 참호가 파여있다. 봉수가 있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조망이 뛰어난 곳이라 봉수가 있을 만한 장소다. 봉수나 대공포가 있었던 장소에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전술은 고대나 현대에도 큰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정상에는 호봉(虎峰)이라는 글자를 새겨진 표석이 있다. 1984년 12월12일 맹호부대 김진영 사단장의 부임기념 표시다. 용맹스런 호랑이가 있는 봉우리란 뜻인데, 내용에는 “장부의 기상이 늠름한 산제여. 임진란시의 축성의 흔적이 역력한 성재가...”라고 적혀있다. 현리에는 월남전에서 명성을 날렸던 맹호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벽은 급경사지다. 일부구간에서 축성당시로 보이는 석축이 노출돼 있다. 잘 다듬어진 석축의 길이는 5m 정도에 높이가 1m 이내다. 성벽은 내탁이며, 지형은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비탈진 곳이다.
북쪽의 제단터
현리산성에서 지대가 가장 낮은 곳은 남쪽이다. 남벽안쪽은 너른 평지가 조성돼 있다. 현재 남벽은 군 참호시설로 인해 흙더미 속에 묻혀있는데 2004년 지표조사 때 길이 6m의 정도의 성벽과 높이 2.5m가 드러났고, 기존의 성벽에서 조금 들여진 곳에는 후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엉성한 성벽도 확인됐다.
이곳에서 50m 아래에 외성으로 보이는 또 다른 성벽흔적이 있다. 전체길이가 약 50m정도 되지만 석축은 흙더미에 묻혀 있다. 안쪽에는 돌담으로 지은 건축물이 있는데 그 속에는 바위틈에서 흐르는 우물이 있다. 신이장은 예전에 여기 성돌을 빼다가 삼신각을 짓고 산 밑에 절간도 지었다며, 그때 인부를 시켜서 돌을 마구잡이로 뽑아 계곡으로 굴렀다고 했다.
남쪽에서는 현리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성은 성재산(353m)정상을 중심으로 좌우 등성이를 타고 이어진 퇴뫼식 석축산성이다. 전체둘레는 600m 조금 넘는 작은 산성이다.
정상에 세운 맹호부대 표지석
성벽은 서남쪽에 가장 잘 남아 있고, 남쪽에도 석축이 흙더미 속에 묻혀 있다. 경사가 급한 동쪽에는 초축 당시 것으로 보이는 석축이 일부 노출돼 있다. 성벽형태는 바깥은 석축으로 올렸고, 안쪽은 흙으로 메웠다.
현리산성의 초기축성은 기록이 없고, 일제 때 편찬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2004년 정밀 지표조사가 실시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당시 조사를 맡았던 유재춘 관장(중앙박물관관장)은 현리산성이 처음 쌓여진 시기는 백제로 추정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백제산성에서 나타나는 작은 규모의 산성이며, 둘째는 산릉 외사면을 삭토해 내환도(순찰로)를 만들고 축법도 전형적인 백제식 형태라고 했다. 그 후에 고려시대 때 보수를 하고 조선까지 이용했던 것으로 본다며, 현리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볼 때, 오랫동안 주둔한 주체세력은 고려라고 덧붙였다.
축성당시 것으로 보이는 동벽
특히 유관장은 "현리산성은 가평의 역사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유적인데 지표조사로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전반적인 발굴을 통해 보다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며, 군청에서는 성벽이 더 이상 멸실되기 전 문화재 지정신청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청 문화관광과 박영화 계장은 ‘현리산성이 있는 곳은 사유지로서 발굴과정에 어려운 점이 많지만, 가평지역은 문화재가 많지 않은 곳인데, 산성유적을 발굴하고 고증을 통해 복원하면 미래의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오른쪽 박영화 계장과 신제영 이장
춘천에서 가평, 포천, 철원으로 연결되는 옛 길목에 쌓은 현리산성 주변은 드넓은 곡창지대다.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곳에 몰려들었다. 인구가 늘어나자 현이 설치됐던 역사의 고을이다. 이웃한 포천 고모리산성은 성벽의 형태가 거의 없는데도 문화재가 됐다. 가평군수의 노력과 주민들의 뜻이 합쳐지면 현리산성을 살릴 수 있다.
산성을 두어시간 취재하면서 살펴보아도 현리산성에 대한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문화재지정 유무를 떠나 하잘 것 없이 보이는 성벽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조상들이 남긴 귀중한 유적이며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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