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수원화성 동북각루에 새겨진 십자가
벽면에 새겨진 십자가
수원화성 시설물 중, 조선후기 건축예술의 백미로 꼽는 동북각루(방화수류정)에 새겨진 천주교의 상징인 십자가문양이 최근 화제다. 십자가는 화홍문방향으로 나있는 서쪽벽면 검은 전돌 사이사이에 회와 모래, 진흙을 혼합한 허연 전돌 86개가 십자형태다. 각루 천장 동남북 쪽에도 나무로 다듬은 3개의 십자가가 만들어 졌다.
얼핏 보기에는 단조로움을 피해 조각해 놓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의도적인 발상으로 보인다. 벽면과 천장의 십자가 문양은 당시 금지된 천주교를 은밀히 홍보하는 방법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화성설계의 주인공인 다산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정조의 최측근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다.
가부장적인 권위와 유교적 의례를 거부하는 천주교 번성은 조선시대의 유교사회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의 중대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천주교도에 관대했다. 그의 속내는 천주교를 신봉했는지 모르지만. 그로인해 천주교는 교세확장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게 됐다.
천장에 새겨놓은 십자가
훗날 정조가 갑자기 의문사 한 후, 그의 아들 순조가 어린나이에 임금이 되자, 화성 안에 있던 성당에서는 천주교도 탄압이 일어났다. 100여명의 신도가 참수를 당하면서 전국의 천주교인 박해가 시작됐다.
‘공개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동북각루에 새겨진 십자가에 대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벽면도 그렇지만 천장에는 완벽한 십자가로 만들었습니다.’김충영 국장(수원시청 건설교통)은 최근에 십자가를 구경하려는 관광객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동북각루 지하실로 안내했다. ‘저 빛을 보세요. 신비하지 않습니까? 지하 위에는 적의 동태를 관찰하는 시설로 지었지만 사용 빈도가 낮았고, 오히려 정자로서 활용도가 많았습니다. 지하는 한 10평정도 공간인데, 성벽에 총을 쏠 수 있는 19개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깜깜한 지하실로 19개의 총안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는 화성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몰보라속의 화홍문
화홍문 오른쪽 언덕에 솟아있는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으로도 불렀다. 정자를 받쳐주는 둔덕은 동쪽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끝부분이다. 용머리 형태를 닮은 바위위에 성벽과 이어져 지은 각루는 날아갈듯이 서있다. 이 정경(情景)을 군사시설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색적으로 보인다.
정자 아래는 아담하게 조성된 작은 연못도 만들었다. 용이 사는 연못이라 해 용연으로 불렀다. 용연 한가운데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섬도 만들고 수양버들 몇 그루도 심었다. 연못에 물이 넘칠 때를 대비해 돌로 용머리를 만들어 그곳으로 물길을 냈다.
호화로운 운치를 더해주는 방화수류정의 매력은 또 있다. 정자를 받쳐주는 기둥과 벽돌, 처마와 지붕의 아름다움은 극에 달한다. 정자의 형태는 특이하다. 처마나 기둥은 ㄱ자로 꺽이면서 다시 튀어나오고, 지붕도 꺽어지길 반복한다. 지붕 중앙에는 서장대 지붕위에서 볼 수 있는 항아리 모양의 절병통 장식도 눈길을 끈다. 방화수류정의 지붕구조를 제대로 보려면 지대가 높은 동쪽 북암문에서 보아야 한다.
용머리에 있는 정자
또 하나의 특징은 정자를 받치고 있는 돌 위에 목조기둥이다. 한 기둥인데도 아래쪽은 둥글고, 위에는 네모지게 만들어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아름답게 디자인 한 각목을 촘촘히 세웠다. 회흑색 전돌을 빈틈없이 메웠다. 정자 앞에 동그랗게 다듬은 아치문의 조형미는 감탄사를 자아낸다.
용연은 세월이 흘러 연못주위가 많이 매몰됐지만, 창건당시 방화수류정일대의 풍광은 대단했다. 정조는 화성행차 때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면서 조선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가 함께 숨 쉬는 거대한 도시를 꿈꿨다.
조선후기 건축의 백미로 남은 정자에서 멀리 내려다본다. 동으로는 연무대와 동북공심돈, 서로는 장안문과 팔달산이 한눈에 조망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 일대는 노송이 우거져 장관을 이루었다. 방화수류정 앞에는 여섯 그루의 큰 소나무가 있었다. 그 육지송을 보지 않고서는 수원을 다녀왔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각루 지하시설을 설명하는 김국장
방화수류정 아래 화홍문은 화성을 관통하는 수원천 북쪽수문이다. 안양 만안교와 같은 7칸 홍예로 축조했다. 수문 한가운데 홍예는 높이와 폭이 크고 나머지 홍예는 크기가 모두 같다. 홍교위에는 누각을 세웠고, 처마 아래로 ‘화홍문’이라는 현판을 걸어 웅장하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로 건물을 지었다. 홍교길이는 약 30미터, 폭은 8미터로 누각 양쪽에 돌계단을 내어 누상으로 오를 수 있게 했다. 수문에는 침투하는 적을 막기 위해 쇠살문을 설치했던 흔적이 있다.
수문앞에는 네 개의 돌계단을 만들어 급하게 흐르는 물을 부드럽게 떨어지도록 했다. 중국의 새로운 축성기술을 도입해 쌓았다는 화홍문 뒤 성벽에는 총과 활을 쏠 수 있는 총안을 설치했고, 뒤쪽 석축은 돌로 다듬은 일곱 개의 물받이가 튀어나와 있는데, 양 측면에 연화문을 새겨놓았다. 다리 양쪽 끝에 있는 8각형의 좌대위에는 이무기 상을 하나씩 다듬어 놓고 다리를 지키고자 했다. 홍예의 돌을 떠받치고 있는 교각도 모서리를 세워 흐르는 개천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배려했다.
용머리의 수구
화홍문으로 올라가본다. 시원한 강바람이 온몸 속으로 스며든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반질반질한 목판바닥에 드러누워 오침을 즐기는 사람, 한쪽에는 도란도란 말을 주고받는 정겨운 풍경도 펼쳐진다. 문루에 걸터앉아 수문아래를 본다. 지금은 물줄기가 많지 않지만, 1940년대 까지만 해도 수문에서 떨어지는 물보라는 화홍관창이라 불릴 만큼 기묘하고 아름다웠다.
물이 쏟아질 때 화홍문 앞에는 구경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화성은 전투만을 목적으로 조성된 성이 아니라 조경과 미감에 무척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화홍문의 뒷모습
사진은 잃어버린 옛 기억을 불러내고, 또한 귀중한 사료가 되기도 한다. 추억을 덤으로 주는 옛 사진은, 그래서 숱한 사연을 품은 이야기 덩어리다. 1920년쯤에 찍은 화홍문 주변은 빨래하는 아낙네와 일본인이 벌려놓은 천막가게를 빼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퍽퍽퍽퍽 방망이소리, 철벅철벅 빨래 헹구는 소리, 아낙네들의 수다와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섞여 수원천 물줄기를 따라 흘러간다. 개천좌우에는 버드나무 몇 그루가 물위에 환히 비친다. 빨래터는 찌든 살림살이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곳이자. 마을사람들의 근황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빨래를 헹구고 방망이를 치면서 아낙네들은 시집살의의 고달픔도 함께 두들기고 씻어냈다. 그곳에는 고부간의 갈등, 남편의 주벽, 자식들 장래문제까지 가정을 꾸려가는 아낙네들의 고단한 삶이 빨래보다 더 푸짐하게 널려있다.
지금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건조까지 되는 편리한 세탁기가 넘쳐나지만, 옹기종기 모여 애환과 정담을 나누던 화홍문 앞뒤의 빨래터가 그립다. 냇가에서 들려오는 빨래방망이 소리는 우리들의 어머니 소리였기 때문이다.[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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