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 특별기획-참전 여군을 찾아서②>반평생 군서 살아온 사연
"왜 나라 지켜야하는지 요즘 애들 몰라…천안함 처음부터 북 소행 알아"
이수행 할머니는 체념했다. 최근 북한 관련된 우리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할머니는 "전쟁을 해 본 우리가 북한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우리 이야기가 나간다고 뭐가 더 바뀌겠어? 괜한 짓 하는 거야.”
지난 26일 오전 대구시 남구 대명동의 한 작은 교회 벤치에서 만난 이수행 할머니(여·78·해병대4기)는 체념 섞인 말부터 내 뱉었다. 북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는 최근의 국내 정세가 할머니를 체념케 한 것이다. 그래도 목소리는 아직 까랑까랑했다. 지난 18일부터 3일 동안 강원도 양구를 다녀온 할머니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해병대 4기다.
“해병대에서 우리 같은 노병들에게 전방 모습을 견학시켜주는데 올해는 강원도 양구로 데려가더라고. 우리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는 모습을 보니 예전 생각도 많이 나고 참 고맙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어.”
할머니의 고향은 제주도였다. 6.25가 발발했던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였고, 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어른들이 전쟁이 터졌다고 해 그런가보다고 생각했다. 제주도까지 북한군이 밀려오지도 않았고, 총알이나 포탄 한발 날아오지도 않았다.
“내가 그날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8월 30일이었지. 갑자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구잡이로 나오라는 거야. 126명의 여학생들이 모였고, 그래서 전쟁 속으로 들어가게 된 거야. 가족들이 전부 나와서 배에 실려 가는 126명의 여학생들을 배웅했지. 모두가 그랬어. 살아서 돌라오라고. 아마도 그날은 제주도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을거야.”
126명의 여학생을 태운 배는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제주도를 떠나 해군 사령부가 있던 진해로 향했다. 진해에 도착한 할머니에게 처음 다가온 것은 기초 군사훈련이었다. 지급되는 군복과 전투장비는 생소했고, 교관의 모습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초 군사훈련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학생들에게는 고통이었다. 처음 만져보는 전투장비는 여름이었지만 차갑게 다가왔고, 남자 체형에 맞춰진 군복은 움직이기조차 불편했다. 섬에서 육지로 건너와 4주 동안 진행된 훈련은 어린 여학생들의 의지마저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126명의 훈련생 가운데 50명은 훈련을 마친 뒤 전역했다. 훈련의 고단함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 여학생들이 감내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건너온 126명의 여학생들은 여성 학도병이었던 것이다.
“참 힘들었어.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교관이 우리에게 던진 말들이 더 서럽고, 더 힘들게 만들었어. 교관들은 ‘전쟁 중에 먹을 것도 없는데 세끼 챙겨주는 걸 고마워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고...... 아마도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더라고.”
1950년 8월, 진해에서 제주도 여학생들이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기념 촬영을 한 장면이다. 당시 기초군사훈련에 참여한 이수행 할머니는 위에서 네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다.
할머니는 군사훈련을 마친 뒤 전쟁 속으로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마음을 다 잡았다. 전역한 여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76명은 서로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뿔뿔이 흩어진 여학생 가운데 할머니는 진해 해군사령부에서 인사 담당을 하게 됐다. 실제 전투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전쟁 상황이 시시각각 보고되는 모습을 보면서 6.25가 도대체 무엇인지, 왜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 알게 됐다.
“후방에 있었지만 전쟁 상황을 다 보고 있었어. 전방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후방에서도 보면 그런 지옥은 없었을 거야. 먹을 것이며, 입을 것이며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 게 없었던 시절이잖아. 전쟁은 그 자체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지옥이란 말이야.”
할머니는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군 생활을 하고 전역했다. 그리고 고향인 제주도로 다시 돌아가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한 할머니는 다시 진해로 건너가 해군 부대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하게 됐고, 반려자도 만나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그래서 일반 직장 근무자가 아닌 군무원으로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거야. 그러다 해군 대위였던 남편을 만났고, 대구에서 정착하게 된 거야. 그러다 남편과 사별하고, 1969년부터 대구 미군 캠프 워커와 헨리에서 14년 동안 근무했지. 6·25 전쟁이 나를 완전한 군인으로 만든 것 같아.”
할머니는 최근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가슴이 철렁거렸지. 위험에 빠진 우리나라를 구해준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의 동상을 철거한다고 했을 때 또다시 60년 전 전쟁이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직접 철거 반대 시위를 하기도 했어. 천안함도 마찬가지야. 처음부터 북한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지. 북한, 아마도 전쟁을 경험해 본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데일리안 대구경북 = 최용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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