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주전자

입력 2010.03.20 08:42  수정

<들찔레의 편지 276> 차 한 잔을 음미하는 나는 향기로운 사람,

눈매 깊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봄기운이 조금씩 돋는 어느 휴일 오후,
옅은 햇살이 비치는 마루에 놓여진
무쇠주전자 두 개가 눈에 띕니다.
차를 마실 때라야 제 역할을 하는 물건임에도
그냥 한 쪽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며 놓여 있는 무채색의 주전자가
햇살을 받아 따스해 보입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차는 늘 나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위로와 더불어 나를 침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차의 종류나 성질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또한 어떤 것이 좋은 차인지 나쁜 차인지도 잘 모릅니다.
다만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차를 골라 마십니다.

모든 차에 앞서 가장 먼저 마시는 차는 황포차 입니다.
헛되이 과식을 한 경우는 보이차 같은 발효차를 마십니다.
술을 마신 뒤에는 쑥차도 좋습니다.
아침식사 뒤 한참 일을 하는 오전의 중간쯤에 틈이 나면 녹차로 입안을 헹굽니다.
미음이 우울할 때는 단맛에 향기 그윽한 국화차나 댓잎차, 철관음을 마십니다.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때는 천천히 시간을 저어 말차를 마시기도 합니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데는 물론 잘 만들어진 차가 있어야 합니다.
꽃 한 송이가 차가 되기 위해서는 향을 죽이지 않을 만큼의 은근한 햇살에
오랜 세월 탈수가 되어야 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차나무 잎 한 장도 차가 되기 위해서도
가마솥에서 몇 번씩이고 덖어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불순물과 독성이 제거되고
중화된 식물의 정수가 남게되며 이런 과정에서도
그 찻잎이나 꽃 한 송이가 가지는 색과 향이 죽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 뙤약볕과 눈보라의 계절들을 통해 갖추어진
이런 차들이야말로 선연한 정신을 가진 생명의 힘들인 것이지요.

차의 속성과 맛을 찾아주는 것이 잘 끓인 물이 필요하지요.
물맛이 좋아야 차 맛이 좋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물 좋은 곳을 찾아 차나무를 심었다고도 하며
그런 곳에 있는 너럭바위를 차탁(茶卓)으로 삼았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좋은 찻물을 얻기 위해서는 제 몸을 불에 달구어 가면서
끓게 만드는 것이 저기 마루에 놓여진 무쇠주전자 입니다.
아마도 차주전자는 차 마시기 위한 과정 중 필요한 요소들 중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아닐 지 모릅니다.

찻잎이야말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며 물이 그 다음이란 것을 압니다.
주전자는 스스로를 달구는 가장 희생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어설프게 달구어지고 어설프게 식어버리지 않는
좋은 차주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애초에
주전자를 만들 무쇠부터 잘 담금질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차 한 잔을 음미하는 나는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이고 싶습니다.
향기로울 뿐만 아니라 눈매 깊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만
그런 바램이 차만 마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내밀한 자기 성찰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런 성찰은 자신에 대한 부단한 담금질에 기반 할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차 마시는 일을 수행과 동일시하였고
궁극적으로는 다선일체(茶禪一切)라 하였는가 봅니다.

더운 여름, 추운 겨울을 포함한 녹녹치 않은 세월 동안
얼마나 나를 달구며 살고 있을까요?
스스로를 달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달군다는 것이 오히려 화를 끓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달구기만 하고 스스로 식히지 못한 경우는 없었을까요?

인연이 깊은 누군가의 마음을 데워 주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나는 몇 곱절 더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 함을 압니다.
그런 인연들의 삶을 보듬을 수 있음으로서
비로소 향기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위해
달구어진 몸뚱이에서 기화되어 피어오르는 김처럼
뜨거운 눈물도 흘려 보아야 할 것이고
아픈 것 삼키고도 의연할 수 있어야 깊은 눈매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 보다 귀한 것이 나의 뜨거움으로 인해 제대로 익혀지고 더 돋보인다면
그래서 서로가 따사로울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혹여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어떤 인연이 나로 인하여 나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게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기쁜 일 일 것입니다.

아니 그 어떤 상대나 인연을 고려치 않더라도
나의 심중에 남은 것들, 예를 들어
깊은 상처나 아픔들이 작고 큰 옹이 구멍으로 남은 것들,
부끄러운 것들과 이율배반적인 것들, 알면서도 쌓아놓고 있는 업장들,
안 그런 척 하면서 짐짓 저지르는 숱한 시행착오들도
제때 달구어 끓이고 증발시킴으로서
또한 제대로 끓고 난 후 온전히 제 온도를 낮출 수 있음으로서
사람다워 질 것임을 알게 합니다.

변성이 심한 인간의 물성(物性)을 가지고 똬리 틀고 있는 나는
가끔 윤이 나고파 안달을 합니다만
옅은 빛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는 저 무쇠 주전자는
오직 제가 할 역할 말고는 하지 않는 무던한 존재입니다.

무명천으로 곱게 주전자의 먼지를 닦습니다.
주전자를 닦는 일이 나를 닦는 것임을,
제대로 달구어지기 위한 첫 발을 떼는 것임을 상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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