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간 싸움 붙이면 '욕'이든 '응원'이든 관심 갖고 콘텐츠 소비
'5·18' 이어 '의정갈등' 끌어들여 특정 집단 반발 유도→이슈화
돈 문제 개입되면 더 이상 '창작의 영역' 아닌 '자본의 영역'
닥터X 시청 불매 운동을 주장하는 이미지.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SBS 드라마 ‘닥터X : 하얀 마피아의 시대’가 요즘 화제입니다. 지난 24일 방송된 6회는 20%에 육박하는 시청률(19.5%)로 역대 SBS 금토드라마 최고 시청률 5위에 등극했습니다.
아마 5회까지 이 드라마의 존재를 모르셨던 분들도 계실 겁니다. 닥터X에 대한 관심도를 확 끌어 올린건 6회에 등장한 ‘5·18 민주화운동’ 관련 내용입니다. 그걸 두고 왜 맥락 없이 정치적 논쟁이 있는 사안을 끌어다 디밀었냐느니, 왜 창작의 영역에 끼어들어 시비냐느니 하며 좌우 진영간 싸움이 붙었고 그 와중에 닥터X는 널리 이름을 알렸습니다.
지난 30일 방송된 7회까지 무려 두 회에 걸쳐 5·18 얘길 다루더니 막판에 의대 증원 문제를 슬며시 던집니다. 오늘(31일) 방송되는 8회에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의정 갈등에 다시 불을 붙일 기세입니다. 시청률이 더 오르려나요. 당사자들은 부글부글 끓고, 또 다시 사회적 갈등이 불거지겠지만 방송사와 제작진은 신나겠군요.
앞서 고(故)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에 얽힌 의혹을 다뤄 논란이 됐던 영화 ‘암살자(들)’은 지난 29일 누적 관객 340만1825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을 가뿐히 넘었습니다. 닥터X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대척점에 선 두 집단의 다툼이 흥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의 발작버튼을 눌러 싸움을 붙이면 흥행에 성공하는구나.’
아마 진영의 공수가 뒤바뀌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거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영웅시하는 설정, 혹은 5·18에 대한 다른 해석이 영화나 드라마에 삽입된다면 진보의 극단에 있는 분들이 분노할거고 보수 진영에선 창작의 자유 운운하며 맞서겠죠.
2024년 12월 계엄 정국이 한창이던 와중에도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율은 10%대 후반이 나왔습니다. 물론 굉장히 낮은 수준이긴 합니다만, 전 국민 중 그 정도 숫자는 극단적으로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극단적으로 왼쪽에 치우친 이들도 최소한 비슷한 숫자는 될 걸로 봅니다.
진영을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면, 욕하기 위해서든 응원하기 위해서든 해당 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심지어 소비까지 해 주는 이들이 전 국민의 30~40%는 된다는 얘깁니다.
닥터X 6회의 한 장면. SBS 방송 화면 캡처
물론, 암살자(들)이나 닥터X 제작자들이 의도적으로 좌우 진영의 싸움을 붙여 흥행을 유도하기 위해 정치 코드를 넣었다고 몰아갈 수는 없습니다.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닥터X에 원작에 없는 설정을 넣는가 하면, 건조하고 직설적인 ‘극 T’의 주인공을 뜬금없이 감정적 갈등의 한복판에 세워놓았다는 점에서 의도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많긴 하지만, 제작자 측이 아니라고 하면 어쩌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제작진의 의도와 무관하게 닥터X가 ‘발작버튼을 누르면 성공한다’는 공식을 증명해 이 분야 종사자들에게 상당히 부적절한 학습효과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라는 말이 있습니다. 창작을 하고 예술을 하는 분들도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흥행이 돼야 돈이 들어오고 제작진과 배우와 스탭들도 생계를 유지할텐데, 검증된 흥행 공식을 외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령 작가와 연출자가 작품의 완성도를 저해한다며 지조를 지키려 해도, 투자금 회수를 해야 생존하는 제작사와 투자자가 확실한 흥행 코드를 작품 속에 욱여넣지 않도록 그냥 둘 지는 의문입니다.
가뜩이나 우리 국민들은 극심한 정치적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좌우의 극단적 대립을 부추겨 돈벌이로 악용하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진다면 분열 양상은 더욱 심해지고, 이는 더 좋은 돈벌이 수단이 되는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등장하는 것 자체를 원천적으로 금지한다면, 그건 창작의 자유를 저해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돈 문제가 개입되면 그때부턴 ‘창작의 영역’이 아닌 ‘자본의 영역’입니다.
분열을 조장해 돈을 벌어 먹겠다는 의도가 명확하다면 제도적 규제가 가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중도 그런 저열한 상업주의에 낚이지 말고 관심을 끊는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창작자들도 흥행을 노리고 작품의 내용 전개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분란을 일으킬 만한 설정을 넣는 일은, 아무 맥락 없이 여배우의 옷을 벗기는 것 만큼이나 지저분한 돈벌이 방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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