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신시·에이콤, 현지 창작진 이끌며 제작 전 과정 주도
5천억 쏠림 심화된 내수 시장 한계… “글로벌 IP 검증 위한 필연적 선택”
“브로드웨이에서 한국인 제작자가 성공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제작자가 자리를 잡고 나면 한국인 배우는 물론 한국에서 제작한 작품을 수출하는 사례도 만들 수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가 그 시작이 될 겁니다.”
2024년 4월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 전 뉴욕 브로드웨이 시어터에서 ‘위대한 개츠비’가 개막한 직후였다. ‘드림걸즈’ ‘홀러 이프 야 히어 미’ ‘닥터 지바고’로 세 차례 브로드웨이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 단독 리드 프로듀서로 다시 선 무대였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지난달 17일, ‘위대한 개츠비’는 브로드웨이 1000회 공연을 넘겼다. 한국 제작자가 영미권 창작진을 이끌고 만든 작품이 세계 뮤지컬 시장의 중심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 작품은 한 편의 흥행을 넘어 한국 뮤지컬의 해외 진출 방식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브로드웨이 공연 ⓒMatthewMurphyandEvanZimmerma
그동안 해외 진출은 국내에서 완성한 작품을 현지에서 공연하거나 라이선스를 판매하는 방식, 혹은 국내에서 검증된 창작 뮤지컬을 현지 제작사가 무대에 올리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반면 최근에는 한국 제작사가 기획 초기부터 영어권 시장을 겨냥해 현지 창작진을 고용하고 개발을 주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당장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 초까지 굵직한 신작들이 이어진다. 지난달 28일 영국 런던 채링크로스 시어터에서는 에이콤이 제작한 뮤지컬 ‘프란츠앤마리’가 개막했다. 독일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미완성 희곡 ‘보이첵’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11월 2일에는 신시컴퍼니의 신작 ‘네로’가 런던 사우스워크 플레이하우스 엘리펀트에서 트라이아웃(시범공연)의 막을 올린다. 오디컴퍼니의 차기작 ‘어거스트러쉬’는 내년 3월 27일부터 미국 샌디에이고 올드 글로브 극장에서 브로드웨이 입성 전 트라이아웃을 앞두고 있다.
이 가운데 ‘네로’와 ‘어거스트러쉬’는 국내 무대를 거치지 않는다. 앞서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듯 첫 평가를 영미권 관객에게 받는다. 한국에서 완성한 작품을 번역해 가져가는 대신, 기획 단계부터 영미권 시장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신 대표는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IP로 자리 잡으려면 전 세계 인재와 관객이 모이는 중심지에서 검증받는 것이 세계화에 더 빠르고 확실하다고 판단했다”며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문학의 정수이기에 브로드웨이에서 정면 돌파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설명했다.
'프란츠앤마리' '네로' 포스터 ⓒ에이콤, 신시컴퍼니
신시컴퍼니 판단도 궤를 같이한다. ‘네로’는 극작가 스티븐 세이터가 2006년 구상해 2015년까지 두 차례 워크숍을 거쳤으나 이후 개발이 멈춘 프로젝트다. 신시컴퍼니는 2022년 메인 프로듀서로 합류해 이번 런던 트라이아웃까지 제작비 전액을 부담했다. 신시컴퍼니 박명성 예술감독은 “‘네로’를 한국에서 먼저 공연한 뒤 번역해 해외로 가져가는 방식도 가능했겠지만, 처음부터 영어권 관객과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둔다면 그 언어와 문화 안에서 인물·대사·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신시컴퍼니가 처음부터 ‘네로’를 택했던 것은 아니다. 박 감독에 따르면 당초 연극 ‘푸르른 날에’의 뮤지컬화를 해외 창작진과 추진했으나, 서구권 내에서 ‘문화적 전유’에 대한 경계가 높아지면서 중단됐다. 한국 역사를 다루는 것에 현지 창작진이 부담을 느꼈고, 결국 “한국의 역사 이야기는 한국의 창작자들이 만드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방향을 튼 신시컴퍼니는 여러 대본과 쇼케이스를 검토한 끝에 동서양 관객 모두에게 익숙한 보편적 인물인 ‘네로’를 최종 선택했다.
에이콤의 ‘프란츠앤마리’는 앞선 두 작품의 중간 형태다. 2005년 영국 밴드 싱잉 로인스에 의뢰해 8년간의 워크숍을 거쳐 2014년 ‘보이첵’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초연했던 작품을 현지 시장용으로 다시 개조했다. 이번 런던 공연은 현지 작가 테레사 하워드가 새로 각색하고 마이클 오클리가 연출을 맡아, 14명의 배우가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액터-뮤지션’ 형식으로 꾸려졌다. 런던 채링크로스 시어터 측 제작자 스티븐 M. 레비가 공동 제작으로 참여한다.
현재 영미권 현지 제작에 나선 오디컴퍼니, 신시컴퍼니, 에이콤은 지난 20~30년간 라이선스와 대형 창작 뮤지컬로 한국 뮤지컬 산업의 체급을 키워온 1세대 제작사들이다. 이들이 오랜 시간 축적한 기획력과 자본이 해외 진출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 제작사들이 적극적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는 배경에는 국내 시장 한계가 있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의 ‘2025년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뮤지컬 티켓 판매액은 4989억원으로 전년 대비 7.2% 늘었다. 그러나 상위 10개 작품이 전체 매출의 35.7%(약 1783억원)를 쓸어 담아 ‘쏠림 현상’이 전년보다 4.7%포인트 높아졌다. 상위 10개 작품 모두 1000석 이상 대극장 공연이었다. 반면 공연 1회당 평균 티켓판매액은 6.5%, 티켓 1매당 평균 판매액은 1.6% 줄었다. 시장 전체 파이는 커졌지만, 회당 수익성은 오히려 떨어지고, 소수 대형작에만 매출이 몰린 것이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냉정하게 말해 내수 시장만으로는 규모와 수익성에 뚜렷한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신춘수 대표는 앞선 세 번의 브로드웨이 도전 실패와 현재 ‘위대한 개츠비’의 흥행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단독 리드 프로듀서’로서의 권한을 꼽았다. 2014년 ‘홀러 이프 야 히어 미’와 2015년 ‘닥터 지바고’는 브로드웨이에 입성했지만 각각 4주, 3주 만에 막을 내렸다. 신 대표는 “과거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하며 작품의 방향성을 잃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직접 창작진을 이끌며 예술적 판단을 내리고 밀어붙인 것이 성과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공연 ⓒNHN링크
현재 한국 뮤지컬의 영미권 진출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위대한 개츠비’와 ‘네로’의 방식이다. 한국의 기획력과 자본이 영미권 창작진과 함께 현지 시스템 안에서 작품을 만들고 주도권을 쥔다. 다른 하나는 한국 창작진의 작품이 영미권에서 인정받아 진출하는 방식이다. 2016년 대학로에서 초연한 ‘어쩌면 해피엔딩’은 미국 제작자 제프리 리처즈가 브로드웨이로 가져가 지난해 토니상 6개 부문을 받았다. 라이브의 ‘마리 퀴리’는 2024년 런던 채링크로스 시어터에서 대본과 음악은 유지하고 무대·조명·의상은 현지 창작진이 새로 만드는 ‘논 레플리카’ 방식으로 공연됐다.
정부 산하 기관인 예술경영지원센터(예경)도 이 흐름에 맞춰 지원 구조를 바꾸고 있다. 서유미 예경 공연예술본부 팀장은 “영미권 현지 뮤지컬 시장도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크고, 한국 뮤지컬의 독창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며 “센터가 운영 중인 ‘영미권 중기개발 지원’과 ‘영미권 시범공연 지원’이 이러한 현지 직접 개발 방식을 지원하는 대표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업계는 이 흐름이 갑자기 튀어나온 유행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박명성 감독은 “한두 해 만에 만들어진 흐름이 아니”라며 “라이선스 작품을 받아 공연하던 단계에서 시작해 이제는 한국 제작사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해외 시장을 바라볼 수 있는 인력과 기술, 경험을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신춘수 대표는 “현지 직행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며 “한국 뮤지컬 특유의 추진력에 영미권의 견고한 작품 개발 시스템을 어떻게 결합하느냐, 즉 현지 시스템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활용하느냐가 최종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