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 이후 한 세대 성장과 함께 경계의 대상에서 취향된 日 콘텐츠
‘왜색’부터 따지던 시절 지나…낮아진 일본 콘텐츠의 심리적 장벽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20대 직장인 최 씨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한 건 어린 시절이다. 당시 20대였던 막내 삼촌과 함께 자라면서 '드래곤볼'과 '슬램덩크' 등을 자연스럽게 봤다. 비디오테이프가 주요 영상 매체였던 시절이라 해적판 비디오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하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해적판 비디오로 작품을 접하던 어린 시절과 달리 지금은 극장과 전시, 팝업스토어를 찾아다니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긴다. 좋아하는 작품은 극장에서 여러 번 다시 보는 'N차 관람'도 한다.
지난해에는 '블리치전 애니메이션 20주년 기념 서울 전시'와 '극장판 주술회전 0' 전시, '사카모토 데이즈' 전시회를 찾았고, 올해 초에는 용산 아이파크몰의 '점프샵 인 서울' 팝업스토어에도 다녀왔다. '주술회전: 회옥·옥절'은 응원봉을 들고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리액션 상영회로 관람했다.
최 씨는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많이 봐서 일본 문화가 낯설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다"며 "일본 작품이라는 걸 모르고 보는 건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볼지 말지 고민하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작품을 고를 뿐"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20대에게는 자연스러운 풍경이지만 30년 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1990년대까지 일본 대중문화 공식 유통은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그렇다고 소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해적판 만화책과 복제 비디오 등 비공식 경로로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었다. 만화 '시티헌터' '슬램덩크' '드래곤볼' 등은 정식 수입이 되기 전에 해적판이 돌았고, 일본 밴드 음악 역시 불법 복제 테이프가 판매됐다. 국가기록원 1998년 자료에도 '불법복제 일본만화 홍수', '빗장 없는 사이버공간선 일본대중문화 이미 활개'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블리치' 전시회 ·'주술회전' 팝업 전시회 ·'사카모토 데이즈' 팝업 ·'주술회전' 응원봉 리액션 상영회.ⓒ인터뷰이 제공
50대 초반 황 씨는 "친구가 가져온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보거나 일본 만화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며 "지금처럼 제목만 검색하면 바로 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보고 싶은 작품 하나를 찾는 것부터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일본 문화 개방은 지난 1998년 10월 김대중 정부가 영화·비디오·출판 일부를 여는 것으로 시작됐다. 1999년 2차 개방에서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전체관람가 영화로 2000년 3차 개방에서 12·15세 관람가 영화와 국제영화제 수상 애니메이션으로 범위를 확대했고 2004년 1월 영화·음반·게임이 전면 개방됐다.
당시 원칙은 국민 거부감이 적은, 이른바 '왜색이 옅은 분야'부터 여는 것이었다. 일본 문화의 유입 자체가 사회적 논쟁거리였고 국내 문화산업이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도 뒤따랐다.
당시 여론에서도 일본 문화에 대한 경계심은 뚜렷했다.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개발원이 1998년 실시한 조사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가능하면 늦춰야 한다'는 응답은 48.5%, '절대 개방해서는 안 된다'는 응답은 14.6%로, 둘을 합하면 63.1%에 달했다.
약 30년이 흐른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국갤럽이 2025년 8월 전국 만 18세 이상 1007명을 조사한 결과 일본에 '호감 간다'는 응답은 38%였다. 특히 20대는 61%, 30대는 53%가 호감을 보였다. 인식이 개선되면서 일본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비를 망설이던 진입장벽도 낮아졌다.
다만 심리적 부담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호감 가지 않는다'는 응답이 45%로 여전히 호감보다 많았다. 2019년 '노재팬' 운동 당시처럼 한일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일본 콘텐츠 소비가 논쟁거리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극장·음원 넘어 공간으로…달라진 일본 문화 소비
인식 변화는 실제 콘텐츠 소비에서도 확인된다. 2000년대 초중반 국내에서 흥행한 일본 애니메이션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지브리 작품이 대표적이었다. '포켓몬스터'처럼 이미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TV 애니메이션의 극장판도 관객과 만났지만 흥행작은 일부 작품과 지식재산권(IP)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부터 만화 원작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귀멸의 칼날' 시리즈까지 서로 다른 감독과 IP의 작품이 잇따라 흥행했다. 지난해에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국내 개봉 일본영화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CJ ENM
눈에 띄는 건 시점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25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극장 관객은 1억 609만명으로 전년보다 13.8% 줄었다. 극장 산업 전체가 위축되는 상황에서도 강한 팬덤을 확보한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관객이 움직였다.
소비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작품을 보고 즐기는 데 머물렀다면 지금은 좋아하는 콘텐츠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 오프라인 공간을 찾아간다. 전시와 팝업스토어, 굿즈, 특별 상영 등 하나의 작품을 즐기는 접점도 다양해졌다.
산리오와 포켓몬처럼 오래 사랑받아온 캐릭터부터 최근 애니메이션 속 인물까지, 일본 캐릭터는 이제 패션과 식음료, 생활용품 곳곳에 붙어 있다. 작품을 본 뒤 캐릭터 상품을 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굿즈를 사러 일부러 시간을 내 특정 공간을 찾는 일도 익숙해졌다.
일본 슈에이샤의 공식 굿즈 매장 점프샵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2월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서 한국 첫 기간 한정 팝업을 연 데 이어 8월 부산을 찾았고, 올해 1월에는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두 번째 서울 팝업을 진행했다. 매장에는 '원피스', '드래곤볼', '나루토', '블리치', '헌터×헌터', '주술회전', '사카모토 데이즈' 등 세대를 달리하는 일본 만화 IP가 한데 모였다.
팝업이 굿즈를 '사는' 곳이라면 전시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극장판 주술회전 0' 전시는 캐릭터 의상과 조형물, 작품 속 공간을 구현해 관람객이 장면 안에 직접 서 볼 수 있도록 했다. 20년 넘게 팬덤을 유지해온 '블리치'는 20주년 기념 전시를 열었고, 비교적 최근 등장한 '사카모토 데이즈'도 곧바로 전시로 확장됐다.
메가박스는 올해 6월 홍대점을 아예 '애니메이션 특화점'으로 바꿨다. 국내 멀티플렉스 3사를 통틀어 특정 지점 전체를 한 장르에 맞춰 조성한 첫 사례다. 스크린쿼터 기간을 제외하면 애니메이션을 상시 확대 편성하고 관련 기획전도 연다.
스크린 속 경기에 객석이 함성과 구호로 답한다. 2024년 개봉한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응원 상영회에서는 관객들이 실제 배구 경기를 보듯 카라스노고와 네코마고를 응원했고, 메가박스에서는 앵콜 상영까지 열렸다. '주술회전: 회옥·옥절' 리액션 상영회에서는 작품 전개에 맞춰 색이 변하는 응원봉이 객석을 채웠다. 영화를 혼자 '보는' 자리가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팬들이 함께 반응하는 자리로 바뀐 셈이다.
최 씨의 소비 방식은 이 같은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애니메이션을 본 뒤 마음에 든 작품은 N차 관람하고, 전시와 팝업이 열리면 찾아가 굿즈를 구입한다. 하나의 콘텐츠를 감상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중심으로 소비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과거 일본 콘텐츠 소비가 어렵게 구한 비디오와 만화책, 음반을 '보고 듣는 것'에 집중됐다면 지금은 극장과 전시, 팝업스토어를 오가며 '경험하고 소유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30년에 걸쳐 국적의 벽을 넘은 일본 콘텐츠
일본 콘텐츠가 높았던 심리적 장벽을 넘은 과정은 단계적이었다. 첫 단계는 국적을 지운 채 들어오는 것이었다. 개방은 '왜색이 옅은 분야'부터 이뤄졌고, TV로 방영된 애니메이션은 등장인물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꿨다. '슬램덩크'의 강백호·서태웅처럼 한국 작품인 줄 알고 자란 세대도 적지 않다. 거부감을 정면으로 건드리지 않고 작품부터 먼저 닿게 한 셈이다.
다음은 그 작품들이 한 세대의 기억이 되는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TV와 비디오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는 이제 극장표와 굿즈를 직접 사는 소비자가 됐다. 이들에게 일본 작품은 외국 문화이기 전에 성장기의 일부다.
작품의 층위가 두터웠다는 점도 컸다. 지브리란 브랜드에 기대지 않고 감독과 장르, 세대가 다른 IP가 겹겹이 쌓였다. 특정 작품 하나가 아니라 취향마다 고를 작품이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일본 콘텐츠는 '한때의 유행'이 아닌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이 단계에 이르자 더는 국적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은 원작 이름 그대로 OTT에 공개되고, 팬이 직접 경험하는 접점을 통해 스스로 저변을 넓힌다.
K콘텐츠는 드라마와 음악, 영화를 앞세워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흥행이 일시적인 열풍을 넘어 현지의 일상적인 문화 소비로 자리 잡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K'라는 이름 자체가 경쟁력이 된 지금이야말로 그 이후를 고민해야 할 때다.
한국 시장에 뿌리내린 일본 콘텐츠의 지난 30년은 이 지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높은 심리적 장벽 앞에 섰던 일본 콘텐츠는 개별 작품으로 먼저 관객과 만났고, 그 작품을 보고 자란 세대와 함께 취향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극장을 넘어 전시와 팝업스토어, 굿즈, 특별 상영으로 발을 넓히며 국적이 선택을 가로막던 벽을 한층 낮췄다. 결국 관건은 한 편의 흥행 성적이 아니라, 작품이 현지의 일상에 스며들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다. 해적판 비디오로 시작해 응원봉을 든 극장 객석에 이르기까지, 일본 콘텐츠가 한국에서 보낸 30년이 그 시간의 무게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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