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사랑' 강조하는 각종 이벤트…술자리 '훈민정음 게임'까지
한국어·한국문화 위상 높아져…거제 야호 등 외국어 밈 수용 유연성
'좌아하다' 등 우리말 본류 흐리는 조잡한 조어는 경계해야
'갸루의 자세에 대해서 배워보았습니다'에서 나온 '거제 야호' 밈. 유튜브 채널 '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 캡쳐.
10월 9일 한글날입니다. 온갖 비속어와 외국어, 문법에 맞지도 않는 조어와 은어를 잘만 쓰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세종대왕께 죄송하지도 않냐고 ‘우리말 사랑’을 외치며 바른말 쓰기를 강조하는 바로 그날입니다.
사실 한글날 ‘글쓰는 법’보다 ‘말하는 법’에 더 집착하는 건 모순이긴 합니다. 세종대왕 이전이라고 우리 백성들이 중국어를 쓰고 살았겠습니까. 세종대왕이 주도해 창제한 것은 훈민정음, 즉 ‘한글’이지 ‘한국어’는 아닙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한글사랑 하는 김에 우리말 사랑도 같이 하자는 데 시비 걸 생각은 없습니다. 한글 창제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글, 우리말을 바로 쓰자고 다짐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한글날에는 흔히 쓰이던 외국어와 문자도 잠시 자리를 내줍니다. 공중파 방송사는 화면 한쪽 구석에 KBS, MBC 등 영문 이니셜로 박아 넣던 로고를 ‘한국방송’, ‘문화방송’으로 바꿔놓고 네이버, 다음 같은 포털사이트들도 검색창 옆에 한글 이름을 달아놓습니다. 술자리에서도 영어를 쓰는 이에게 벌칙을 주는 ‘훈민정음 게임’을 하는 테이블이 종종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일 뿐, 지나치지 않은 수준의 외국어 사용까지 문제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낙후됐던 시절, 외국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좋아 보이고 멋져 보이고 귀티 난다 생각하던 분위기에선 문화적 종속을 우려해 우리말 쓰기를 강조해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K-컬처(공교롭게 이것도 외국어네요)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더 깊게 즐기기 위해 한국어를 배웁니다. 세계 각국에서 한국어 표현이 유행어처럼 쓰입니다.
그렇게 문화와 언어는 뒤섞이는 겁니다. 우리 문화와 언어는 다른 것과 좀 섞인다 해서 남에게 종속될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조사 빼고 다 영어인 국적 불명의 문장을 난사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외국어 표현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교정을 강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거제시 홍보대사로 위촉된 걸그룹 리센느. ⓒ거제시
외국어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걸그룹 리센느의 ‘거제 야호’가 핫하지 않습니까. 한국 지명 거제가 들어갔으니 다국적 유행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어쨌든 뒤에 붙은 ‘야호’는 ‘안녕’ 혹은 ‘반가워’ 정도의 의미를 지닌 일본어 인사말입니다.
심지어 일본인 멤버 미나미가 거제소녀 원이의 유튜브에 출연해 갸루(Gal) 콘셉트의 역할극을 하다 나온 밈입니다. 30년 전이었으면 저런 왜색(倭色) 짙은 말을 따라 한다고 욕을 먹었을 일이지만 요즘 어디 그렇습니까.
저 밈 덕분에 리센느는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고, 거제시는 큰 홍보 효과를 얻었습니다. 다들 거부감 없이 즐겁게 ‘야호’를 따라 합니다. 원이의 ‘무섭노’ 소리에 시비를 걸었다가 역풍을 맞은 어느 나이 지긋한 정치인도 ‘야호’를 외치며 꼬리를 내렸습니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종종 산에 올라가 외치는 ‘야호’는 리센느가 유행시킨 일본어 야호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게 일본어였어?”라며 살짝 당황하신 분이 계셨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니랍니다. 정확한 어원은 확인할 수 없지만, 독일어권에서 산악 등반 중 안개 등으로 길을 잃었을 때 서로를 부르거나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외치던 ‘요후(Johoo)’ 또는 ‘요호(Yoho)’라는 외침을 우리 등산인들이 가져왔다는 주장이 유력해 보입니다.
사실 일본어 야호는 억양까지 포함한 원어민 발음을 들어 보면 ‘얏호’에 가깝게 들립니다. 아, 이런 미묘한 발음 차이까지 글로 표현할 수 있다니! 한글의 우수성에 새삼 감탄합니다. 세종대왕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일상생활에서 우리말에 자연스럽게 섞인 외국어 표현들은 억지로 대체할 우리 말을 찾기보다는 말을 간략하게 하거나, 어감을 부드럽게 하거나, 의미 전달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양념’ 정도로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일부는 어느 순간 외래어로 정착하겠죠. 리센느를 ‘걸그룹’ 대신 ‘소녀 가무단’이나 ‘소녀 노래패’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재명 대통령 X 캡쳐.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말의 ‘본류(本流)’를 흐리는 조잡한 조어나 은어일 것입니다. 최근 논란이 된 ‘좌아하다’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좌익 성향의 커뮤니티에서 ‘우아하다’라는 단어의 ‘우(右)’를 ‘좌(左)’로 바꿔서 만들어낸 은어입니다. 한자어를 소리만 가지고 조합하다 보니 ‘우아(優雅)’라는 단어에 담긴 본래의 의미는 무시됐습니다.
커뮤니티 내에서의 이념적 동질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식의 은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건 이념적 편 가르기도 문제거니와 우리말의 건강한 발전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말과 한글은 해외에서 널리 유행하는 K-컬처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 원본 콘텐츠를 우리 스스로 훼손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말을 잘못 사용하면 외국인들도 잘못된 걸 보고 배웁니다.
‘특정 집단 내에서 쓰는 말인데 어떻게 만들건 무슨 상관이냐’고 할 일도 아닙니다. 벌써 그걸 따라 해서 널리 퍼트린 유명인이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대통령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일 자신의 X(옛 트위터)에다 “많이들 함께 해주세요. 좌아하게 말입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가뜩이나 심각한 이념 대립을 완화하는 데 힘써야 할 대통령이 그런 편향된 은어를 사용해 좌우 편 가르기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래 놓고 6일 국무회의에서는 “국어 문법에 안 맞는 엉터리 단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잘못 쓴 단어를 누군가는 지적해 줘야 언어가 정상적으로 발전한다”고 큰소리를 치던데, 일종의 ‘자기반성’인 걸까요.
한글날을 맞아 글도 바로 쓰고, 말도 바로 하고, 기왕이면 남에게 던진 말은 자신도 잘 지키는 건강한 문화 정착을 위해 국민도, 대통령도 다같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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