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딴신문도 못보나, 뭐하는거야!"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09.06.23 09:04  수정
G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

<노 기자의 취재 비망록-67년 구봉광산 매몰광부 구출기①>

매몰후 16일 동안 버틴 광부 취재 과열 오보 양산 해프닝도

1967년 8월 23일 청양군 구봉산이 맥없이 무너진 가운데 매몰 16일 만에 양창선씨가 구출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구봉광산은 대명광업주식회사가 폐광선언을 할 때까지 금을 캐냈던 곳으

"어이 신 기자! 지금 어디있는 거요? 빨리 회사로 들어와 출장 갈 준비하시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1967년 8월 하순, 나는 사회부 데스크의 명령에 따라 구봉(九峰)광산 출장길에 나섰다. 입사 2년반짜리 주니어 기자로서 지방출장을 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여간해서 얻기 힘든 행운이었다. 나는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그해 8월 23일 충남 청양군 사양면 구룡리에 있는 구봉광산에서 낙반 사고가 나서 광부 1명이 매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도하(都下) 각 신문은 대수롭지 않은 광산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실로 받아들여 1단짜리 5줄 기사로 취급했다.

그러나 매몰된 광부가 하루 이틀 버티고 사흘 나흘이 지나면서 매스컴의 관심도 컸다. 속보 경쟁이 벌어지자 자연히 국민들의 관심도 커져갔다.

사건 직후 대한일보에선 사회부 김부억(金富億) 기자와 사진부 김선호(金善湖) 기자를 파견했었다. 그들이 고생이 너무 심해 체력적으로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호소에 따라 나와 사진부 김영일(金榮日) 기자가 핀치히터로 선발됐다.

우리는 데스크가 건네주는 5만원의 출장비를 받아 지프에 몸을 싣고 구봉광산을 향해 질주했다. 대부분의 국도가 비포장이었던 당시 취재차는 청양을 거쳐 사양면을 행해 방금 소나기가 스쳐간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도중에 지나는 차는 물론 행인 한 명 없는 그야말로 고즈넉한 시골길이었다.

얼마쯤 달려 길이 산모퉁이를 돌게 된 지점을 지날 무렵 길옆 아카시아 숲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건장한 두 젊은이가 우리들의 사이에 들어왔다. 두 명 모두 웃통을 벗어 알몸을 드러낸 채 언뜻보니 신발도 안 신은 맨발차림 같았다. 이들은 길을 가로막으며 두 팔을 벌려 차를 세우라는 몸짓을 했다. 순간적으로 우리들은 모두 움찔 놀랐다.

운전기사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눈짓을 하는 순간, 멈추는 척하다가 휙 달리라고 귀띔해 주었다. 내가 그렇게 판단한 것은 그들이 시골에 있음직한 건달패임에 틀림없다고 보아서였다. 신문사 깃발이 펄럭이는 지프를 세우는 간덩이 큰 놈은 필시 주먹깨나 쓰는 깡패가 아니고 누가 있겠는가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들을 따돌리고 얼마쯤 가자 문제의 대명광업(大明鑛業) 구봉광산의 간판이 보였다. 그날 저녁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대낮에 웃통을 벗고 산적차림으로 국도를 가로막은 장본인은 당시 서울신문 김은구(金銀九) 기자와 신아일보 백동주(白東柱) 기자였다.

그들은 신문기자 커리어로는 데스크급에 있던 대선배였다. 그들은 날씨가 덥고 취재현장의 신통한 기사거리도 없어 시간을 죽일 겸 개천까지 걸어 나와 목욕을 한 후 돌아가던 길이었다. 광산촌은 멀고 온몸은 다시 땀에 젖어 따분해질 무렵 멀리서 달려오는 신문사 지프를 보고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겼던 것이다.

사회부에 전입된 지 얼마되지 않아 그들의 얼굴을 모르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두 선배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두 분 선배님께 “낮에 두 사람을 보는 순간 아! 충청도 심산유곡엔 아직도 엄꺽정 시대에나 출몰하는 산적떼가 있구나”하고 개탄을 했었다고 털어놔 한바탕 박장대소를 했다.

몰려든 내외신 기자들 때문에 숙소가 없어 남의 집 툇마루에서 첫날 밤을 지샌 후 다음날 점검해본 광산촌의 애로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자들이 밤새 모기에 뜯기면서 새우잠을 자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음식이 안 맞는 게 큰 탈이었다. 마을에 두 곳뿐인 장국밥집에선 돼지고기를 삶아 설렁탕식으로 해주는 게 유일한 메뉴였다.

금광석을 채굴하는 광부들은 돌가루를 들이마셔 생기는 규폐증을 예방하려면 돼지고기가 필수적이라는 얘기였다. 하는 수 없이 입에 맞는 식사를 하려면 눈치껏 청양읍으로 달려가 한 그릇 비우고 돌아오는 전격작전을 펴야 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뉴스가 될 만한 ‘기사’가 없고, ‘통신’수단이 열악한 점이었다. 지하 10m의 수직갱옆 대피소에 갇혀 쇠 파이프를 통해 외부와 통화함으로써 살아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외엔 특별한 기사거리가 없었다. 현대식 장비를 투입한 굴착작업은 굼벵이나 다름없어 진전된 기사를 쓸래야 쓸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챙이 기자로서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일부 고참 기자들의 이른바 작문성 뻥튀기 기사였다. 4.19 이전부터 취재활동을 하는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최고참 기자들이 앉아서 머리로 기사를 꾸며 본사에 송고함으로써 연일 톱 아니면 중간 톱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사회면을 장식했다.

"거기서 뭣하는 거야! 당신들은 다른 신문도 못 보는가. S일보엔 오늘도 또 양(楊)씨의 구출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등의 광산기사가 톱인데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아예 나를 죽일 작정인가?"

데스크에서 수시로 날아오는 질책성 로켓을 맞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것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방금 광산에 올라가 양씨와 파이프 통화를 하고 생존을 확인했지만 다른 상황은 모조리 꾸며낸거라고 해도 본사에선 믿으려 들지 않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라는 속담도 없지 않지만 그 시절 우리 언론계 일각에선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난다’는 식의 엉터리 기사를 써서 버젓이 활자화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일단 신문에 ‘기사’가 실리면 일반인들 사이에선 곧바로 ‘진실’로 인식되었던 것이 그 시절 매스컴의 위력이었고 횡포이기도 했다. 가자들이 지켜야 할 수칙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는 아래와 같은 것도 있다.

기자는 “발로 조사해서 머리로 기사를 써라’머리로 걷고(步) 발로 썼(記)을 때‘ 왕왕 재판거리가 된다” 이런 원칙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올챙이 기자들은 매일 몇 차례씩 광산에 올라가 양씨의 생존을 확인하고 끝까지 버티라고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가장 곤란한 것은 통신수단의 열악성이었다. 당시 사양우체국엔 외부로 통하는 전화 회선이 2회선 뿐이었다. 따라서 마감시간안에 기사를 보내거나, 회사와 연락을 취하려면 전화선 쟁탈전에서 우선 이겨야 했다.

게다가 어렵사리 전화를 확보해도 문제가 많았다. 감도가 좋지 않은 데다 통화가 끊어지기 일쑤였고, 잡음 때문에 뭐가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아귀다툼 속에서도 일부 조간신문 기자들이 회선을 장시간 독점, 경쟁사를 곤경에 빠뜨려 서로 얼굴울 붉히고 고성이 오가는 일도 잦았다. 전화선을 못 얻은 신문, 통신, 방송 기자들은 청양읍까지 가거나 아예 광천이나 홍성까지 달려가 가까스로 기사를 보내는 등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태가 이쯤되다 보니 기자들 사이에선 전화를 확보하려는 갖가지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몇몇 기자들은 우체국 교환 아가씨들에게 접근, 뇌물공세로 회선을 얻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당시 기자들이 건네준 선물은 스타킹 한 컬레 아니면 화장품 한두 점이 고작이었다. 이런 사실은 양씨가 구출된 뒤 귀경하는 새벽 지프행렬에서 몇몇 기자들이 무용담으로 털어놔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양씨가 구출되기 하루 전인 9월 5일 광산촌에선 씁쓸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날 날씨는 맑았으나, 전날처럼 심하게 덥지는 않았다. 올챙이 기자들은 예의 돼지고기 국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아침부터 광산에 올라가 양씨와 통화한 후 폐석더미에 주저앉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취재경쟁에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기네스 북에 오를 만큼 기적적으로 기록 갱신하면서 목숨을 이어가는 양 씨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모기소리만하게 쇠잔해 있었다. 언제 그 소리가 끊길지 모를 만큼 우리가 열 번 부르면 겨우 한번쯤 “네”소리를 낼 뿐이었다. 구조작업은 여전히 굼벵이어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매몰된 광부 양창선 씨의 아내 김금순 씨가 스님과 함께 남편의 무사구출을 기도하고 있다.

낮 11시가 조금 지날 무렵 광산 언덕을 향해 남루한 옷차림의 여인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양씨의 부인 김금순 씨였다. 그녀는 기자들을 보고는 “정애 아빠가 구출되었다는 데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양씨는 아직 저 속에 있는 데 무슨 말씀이냐. 우리가 방금 통화하고 오는 길이니 믿기지 않으면 직접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눠 보라”고 얘기해 주었다.그 순간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울부짖었다.

“방송에서 방금 정애 아빠가 구출되었다는 뉴스를 내 귀로 똑똑히 듣고 올라 온 것인 데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고목나무 쓰러지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희비 때문에 한순간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환청을 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가엾은 장면이었다. 주변에서 서성이던 이웃들의 부축을 받고 그녀가 내려간 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들의 눈앞엔 또 하나의 희한한 장면이 벌어졌다.

사양초등학교 전교생들이 논밭을 가로질러 광산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랐지만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오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척 감동적이었다.

그 시절 구봉광산 언덕빼기에서 내려다 보면 남쪽으로 넓은 들판이 있고, 그 평야 끝자락 야산아래가 바로 사양면 소재지로서 그곳엔 양씨의 두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비롯, 경찰지서, 면 사무소 등이 있었다. 광산에서 그 마을까지의 거리는 얼핏보아 2km는 됨직했다.

숨이 턱에 닿는 듯이 단숨에 달려온 어린이들은 정애 아빠가 살아났다고 해서 보러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임시뉴스를 듣고 전교생이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정애 아빠가 아직 구출되지 않았다”고 말하자 “우리가 뉴스를 똑똑히 들었는데 누구 얘기가 맞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털어 놓았다. 뒤미쳐 도착한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 임시뉴스를 통해 “구봉광산에 갇혀 굶주림에 시달리던 양창선씨가 방금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교생이 수업을 중단한 채 광산으로 달려왔다는 것이다.

실망한 아이들이 돌아가자 광산촌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점심식사 후 기자들이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무렵 청양읍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갑자기 우렁찬 브라스밴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행렬의 맨 앞줄에 선 청년들은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터져라 노다지! 재건하자 구봉광산!’ 시커멓게 쓴 커다란 글씨가 눈에 띄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기가 찰 지경이었다. 양씨의 구출소식을 들은 청양읍 유지들이 부랴부랴 청양농고 취주악대를 앞세워 광산까지 나팔을 불면서 걸어서 방금 도착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더위에 지쳐 땀투성이었지만 금광을 재건해야 한다는 희망을 찬 결의 때문인지 표정은 무척 밝았다.

이들 역시 양씨의 구출소식이 오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일그러진 표정으로 “세상에 방송이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혀를 끌끌 찼다. 신문에 난 기사나, 방송뉴스를 성경 말씀처럼 받아들여 오던 순박한 양반네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잘못된 임시뉴스가 불러 일으킨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병사는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가는 알 수 있다. 그러나 병사는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승패 등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오직 직속상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 날 광산촌 취재기자들은 오보로 인해 생긴 해프닝은 직접 목격했으나, 어느 방송의 누가 어떻게 오보를 했는지 자세한 경위는 알지 못했다. 무더위에 지치고 모기떼에 뜯기는 등 심신이 피곤했지만 취재기자의 책임감 때문에 우리는 늘상 광산을 떠나지 않고 매일 네댓 번씩 양씨와 육성통화를 했다.<계속>

글/신동철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