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없는 ‘깡통’ 시스템…뮤지컬계, 화려한 스타 마케팅의 민낯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12.15 07:19  수정 2025.12.15 07:19

지난 12월 2일,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프리뷰 공연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주연 배우 전동석이 급성 후두염으로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자, 공연장에 머물던 박은태가 불과 개막 15분 전 긴급 투입됐다. 동료 배우의 헌신 덕에 공연은 취소를 면했지만, 이번 사태는 한국 뮤지컬 시장의 화려한 조명 뒤에 숨겨진 앙상한 뼈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EMK뮤지컬컴퍼니

한국 뮤지컬 시장은 현재 멀티 캐스팅이 보편화되어 있다. 물론 이는 배우의 컨디션 조절을 돕고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분명 합리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나 한국 시장에서 멀티 캐스팅은 이러한 순기능을 넘어, 철저히 ‘티켓 파워’를 극대화하기 위한 공격적인 수익 모델로 활용된다. 각기 다른 팬덤을 거느린 스타들을 여럿 기용해 회차별 매진을 유도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문제는 이 수익 구조에만 매몰된 나머지 위기 상황을 위한 안전장치를 거세해버렸다는 점이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는 주연 배우가 무대에 서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언더스터디(Understudy)나 얼터네이트(Alternate)를 체계적으로 운영한다. 주연급 기량을 갖춘 배우가 무대 뒤에서 항시 대기하며, 유사시 즉각 투입되어 공연의 퀄리티를 유지한다.


반면 한국은 주연 배우의 커버(Cover)를 두지 않는다. 티켓 판매 부진을 우려해 스타 마케팅에 올인한 결과다. 주연 배우에게 사고가 생기면 휴식 중인 다른 스타 배우를 호출해 ‘돌려막기’를 하거나, 그마저 불가능하면 공연을 당일 취소를 하는 식이다. 이번 사태 역시 체계적인 시스템 대신 동료 배우의 개인적 희생으로 무대를 메운 사례에 불과하다.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제작사의 태도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제작사는 당일 캐스팅 변경을 공지하며 “1막 관람 후 퇴장 시에만 환불 가능, 2막 관람 시 환불 불가”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뮤지컬 주연, 또는 비중 있는 조연의 캐스팅 변경 시 공연 취소와 동일하게 수수료 없이 전액 환불이 가능하다. 단, 이는 해당 공연의 티켓 미수령자 또는 공연을 관람하지 않는 관객에 한해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다. 제작사가 1부 시작(오후 7시 30분) 후 캐스팅 변경을 공지했기 때문에, 1부 관람을 허용한 제작사의 ‘조건부 환불’ 조치는 형식상 규정의 테두리 안에 있다.


다만 관객들은 무리하게 대체 배우를 무대에 올리고 관객에게 2막을 관람하지 않아야 환불이 가능함을 고지한 건, 배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심지어 환불 관련 공지를 받지 못한 관객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제작사의 미숙한 대처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졌다. 즉 이번 사태는 법적 책임의 문제를 비롯해 위기 상황에서 관객의 편의와 정서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한 대처라는 지적이다.


또한 법적 정당성이 관객의 박탈감까지 해결해주진 못한다는 점도 문제다. 이러한 갈등의 뿌리에는 한국 공연계가 수십 년째 답습해 온 ‘스타 캐스팅’ 만능주의가 있다. 브로드웨이 관객이 ‘작품’ 그 자체를 소비한다면, 한국 관객은 ‘배우’를 소비한다. 내가 선택한 배우를 보기 위해 지갑을 연 관객에게 캐스팅 변경은 단순한 변수가 아닌 상품 가치의 하락이다. 이번 환불 논란이 유독 뜨거웠던 이유다.


한 공연 관계자는 “라이브 엔터테인먼트 특성상 배우의 건강 악화, 무대 장치 고장 등의 돌발 변수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표준화된 매뉴얼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면서 “특히 ‘스타 캐스팅’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뮤지컬 시장의 특성상 법적인 부분을 비롯해 관객의 정서까지 고려하는 합리적인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배우 개인’의 헌신과 팬덤에 기대어 연명하는 시스템은 한계가 명확하다. 비용이 들더라도 전문적인 커버 제도를 도입해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작품 본연의 힘으로 관객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관객들 역시 스타 배우가 아니더라도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믿고 신인이나 커버 배우의 무대를 수용해주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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