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탄생 [정명섭의 실록 읽기⑳]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9.30 14:01  수정 2025.09.30 14:01

조선왕조실록을 읽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바로 훈민정음이 창제 되었다고 공표되는 순간이다. 세종대왕에 즉위한 지 25년째인 서기 1433년 12월 30일자 실록에는 그 생생한 순간이 잘 남아있다.


세종대왕 탄생 표지석 ⓒ직접 촬영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이달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12월 중에 완성하고 공표한 것이 분명하다. 민족이나 공동체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언어를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휘발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 하지만 문자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문자를 통해 언어를 보존할 수 있고, 언어를 통해 민족 혹은 공동체라는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를 35년 동안 겪으면서도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은 것이다.


반면,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이 시행한 동화 정책으로 문자를 잃고 한 세대 정도 지나갔다면 우리는 정체성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우리 역시 독자적인 언어가 있고, 그것을 글로 남기기 위해 오랫동안 중국이 사용한 한문과 그것을 음차해서 쓰는 이두를 썼다. 하지만 남의 나라 문자가 우리의 언어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한문은 수만 개의 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익히고 쓰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이라면 정보의 교류와 소통에 큰 걸림돌이었겠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아주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모든 국민이 글을 읽거나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임금을 비롯한 지식인과 그들로 구성된 관료집단 정도만 알고 있어도 나라가 굴러가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많은 통치자들이 국민들이 똑똑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자신에게 반항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조선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한문을 잘 쓰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문자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종대왕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 사실 그 답은 백성을 가리키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 그 자체에 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쳐야 하는데 수만 개의 한문을 하루 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는 백성들이 배울수는 없었다. 그래서 쉽고 간단한 문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삼강오륜 같이 인간의 도리를 논하는 것과 농사직설 같이 우리 땅에 맞는 농사법을 알려주는 책을 연이어 훈민정음으로 펴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지금이라면 크게 환영받거나 최소한 뛰어난 도전정신이라고 칭찬받을 일이었지만 훈민정음의 창제는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특히,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쳐주어도 무지하고 미천하기 때문에 도리를 알지 못할 것이라며 세종대왕의 어그로를 끄는 발언도 있었다. 토론왕이며 최고의 언어학자이기도 한 세종 대왕은 임금이라는 권위까지 더해서 글작 그대로 반대의견을 산산조각 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하룻동안 감옥 체험을 시키고 본보기 삼아서 파직 시킨 신하도 있었다. 세종대왕이 이렇게 강경하게 밀어부친 덕분에 훈민정음을 왜 만들었는지 모르고 무작정 반대했던 신하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자리잡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한다. 실무 관료들을 뽑는 시험을 훈민정음으로 치도록 하는 게 대표적이었다.


훈민정음의 장점은 빠르게 익힐 수 있고, 뜻을 알기 전에 먼저 읽고 쓸 수 있다는 점이다. 똑똑하고 눈치가 좀 있던 하급 관리가 일주일 정도 만에 읽고 쓸 줄 알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는 걸 보면 정말 대단히 뛰어난 문자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한문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지만 훈민정음은 오랫동안 우리의 문자로 사용되었고,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그리고 광복과 함께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문자로 자리매김했다. 흔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훈민정음을 무시하거나 외면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조 때 대사헌 홍양호의 상소문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대왕께서 하늘이 낸 예지로 혼자서 신기를 운용하여 창조하신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화인들에게 물어 보더라도 곡진하고 미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무릇 사방의 언어와 갖가지 구멍에 나오는 소리들을 모두 붓끝으로 그려 낼 수 있게 되는데, 비록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항간의 아낙네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능히 통하여 알게 될 수 있는 것이니.......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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