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성지) [한국의 아름다운 성당 50선㊳]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9.03 14:42  수정 2025.09.03 14:42

용산역에서 노량진으로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독특한 외형의 큰 기와지붕을 볼 수 있다. 새남터 순교성지다. 새남터는 ‘새나무터’의 준말이라고 한다. 지금 이곳은 아파트 숲이지만 조선 말까지는 억새와 나무가 울창한 숲 ‘새나무터’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 새남터는 군사 훈련장이었고 국사범 등 대역죄인들을 처형하던 곳으로, 세조 2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 사육신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

새남터순교성지를 찾아 성모순례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곳곳을 둘러보았다. 대성전에 들어가니 웅장하다는 느낌이 든다. 순교자들의 얼과 기상이 배어 있어서일까. 앞쪽에 앉아 묵상하는 신자들이 있다. 그분들께 방해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고맙게도 직원분이 오셔서 성전 불을 켜 주셨다.


성모순례성당ⓒ


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

대성전과 기념관을 찬찬히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 머릿돌이 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친필사인이 들어있다. 마당이 넓지 않은 터라 성당 외관을 사진으로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친필사인이 들어있는 머릿돌ⓒ

성당 정면에는 “이곳은 새남터 형장입니다”라는 문구 위로 십자가가 있고 기도 의자가 놓여있어 순교자를 참배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곳은 새남터 형장입니다ⓒ

한국천주교회 4대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의 숭고한 피가 새남터에 뿌려진다. 1795년 조선으로 파견된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입국 후 최초로 부활대축일 미사를 거행한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들어와 신자들을 돌보던 중, 입국한 지 6년 만에 배교자의 밀고로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하여 많은 신자가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한다. 결국 주문모 신부는 모진 형벌 후 군문효수형을 받고 이곳 새남터에서 처형당한다.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이다.


조선천주교의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 신부는 1845년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조국으로 들어와 사목하던 중, 1846년 6월 서해 뱃길을 통해서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백령도 부근으로 나갔다가 관헌에 체포된다. 수십 차례 문초를 당하다가 군문효수형으로 이곳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안타깝게도 사제로 서품된 지 불과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로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1956년 현 용산구 이촌 2동에 ‘가톨릭 순교성지’라고 새긴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1981년에 새남터 본당이 설정되었고, 1987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한국전통 양식으로 기념 성당을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또 새남터성당에서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2006년 9월 3일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이곳에서는 성직자 11명과 교회 지도자 3명이 순교하였는데, 그중 9명의 유해가 새남터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비롯해 형구 체험실을 재현해 놓았다.


새남터성지 전경ⓒ

순교는 신앙에 대한 최상의 증거라고 한다. 신앙 선조들에게 순교하러 가는 길은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러 가는 길이다. 자신의 목숨보다 신앙의 뜻을 더 크게 품었던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거닐며 먹먹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

전화 : 02-716-1791

주변 가볼 만한 곳 : 한강공원, 용산역


홍덕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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