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합 "채무자 시효완성 사실 인지 여부, 제반 사정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지난 1967년 대법원 판례 변경…"일반인 상식에 반하는 추정 법리 폐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데일리안DB
채권 소멸시효가 지난 후에 채무자가 채무를 일부 갚았다고 해도 시효이익(채무자가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기간이 지났을 때 채무자가 그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법적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24일 어업에 종사하는 상인 A씨가 B씨를 상대로 낸 배당이의 소송에서 원심의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B씨로부터 4차례에 걸쳐 총 2억4000만원을 빌렸고 그 중 1·2차 차용금 이자 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B씨에게 이자 1800만원을 갚았다.
이후 A씨 소유 부동산에 대한 경매에서 근저당권자인 B씨가 원금과 이자를 합쳐 4억6000여만원을 배당받는 내용의 배당표가 작성되자 A씨는 배당표 경정(更正, 고쳐 잡음)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B씨에 대한 배당액을 4억2200만원으로 경정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기존 대법원 판례(1967년)를 인용해 A씨가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차용금을 일부 변제해 소멸시효 완성 이익을 포기했다고 봤다. 기존 판례는 채무의 소멸시효가 지난 상태에서 일부 채무를 변제하면 차후 나머지도 갚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종전 판례를 변경해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했다 하더라도 채무자가 시효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했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관 8인의 다수의견은 "단지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는 사정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라며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는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이어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채무에서 해방되는 이익을 알면서도 그 이익을 포기하고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사정만 있으면 채무자로 하여금 추정을 번복하게 할 부담을 부과한다"며 "이는 채무자를 본래 법이 예정하지 않았던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노태악·오석준·엄상필·이숙연·마용주 대법관은 다수 의견의 결론에 동의했지만 기존 판례를 변경해야 할 사정은 없다고 봤다.
이들은 "법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심이 법리를 잘못 해석·적용한 것이므로 판례 변경은 필요하지 않다"며 "채무자를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한다거나 부당한 결과를 야기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 측은 이번 판결에 대해 "일반인의 상식과 경험칙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웠던 획일적인 추정 법리를 폐기하고 원칙으로 돌아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했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도록 해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치우쳤던 심리 구조를 공평하게 바로잡고 구체적 타당성을 도모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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